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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 양 · 부씨(高 · 梁 · 夫氏)
고씨, 양씨, 부씨 이 3성의 시조 탄생에 대해서는 삼성혈(三姓穴) 전설이 알려져 있다. 옛날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양을라(良乙那), 고을라(高乙那), 부을라(夫乙那) 세 신인(神人)이 솟아났다.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제주도)는 개척되었다고 한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신라 탈해왕 4년(60)에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왕이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월성석씨(月城昔氏)
신라 남해왕 때에 가락국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수로왕이 맞이하며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그 배는 나는 듯이 달아났다. 이때 마침 포구에 어부가 배를 끌어당겨 보니까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으며 상자가 하나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사내아이 하나와 일곱 가지 보석과 노비들이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나는 원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인데 함달파(含達婆) 왕이 오랫동안 없다가 7년 만에 큰 알을 낳자 왕과 신하들이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라며 상자에 나와 일곱 가지 보석과 노비를 넣어서 배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살만한 곳을 찾다가 산봉우리에 집을 발견하고 숫돌과 숫을 몰래 그 집 마당에 묻은 뒤, 다음날 찾아가서 이 집은 대장간을 하던 우리 조상이 살던 집이라며 땅을 파서 확인시키고 집을 빼앗았다. 후에 남의 집을 빼앗았다 해서 석씨라고 했다고도 하며, 鵲(까치 작)의 鳥를 떼어내고 성을 석씨로 했다고도 한다.
박씨(朴氏)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인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한다. 기원전 69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육부 촌장들이 어느날 알천 언덕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군장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고 하늘에 제례를 올리던 중, 고허촌장 소벌소리가 우연히 나정이란 우물이 있는 곳을 보니 울창한 숲 사이에서 오색채운의 서기가 뻗치고 그 가운데 한 마리의 용마가 소리쳐 울며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알 같기도 하고 박 같기도 한 포가 있어 이를 헤쳐보니 그 속에서 사내 아이가 나왔다. 여섯 마을 촌장들은 그를 신기하게 여겨 하례를 올리고 받들어 길렀다. 그 후 기원전 57년(전한 효선제 오봉원년)에 신라의 초대왕으로 삼아 위호를 거서간이라 하고, 나라명을 서라벌이라 하였으며, 박과 같은 알에서 나왔다하여 성은 박(朴), 이름은 명왕·성왕 혹은 철인·현지자라는 뜻으로 혁거세라 칭했다.
남평문씨(南平文氏)
남평문씨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신라 말에 남평에서 출생하였는데, 서기 472년(신라 자비왕 15) 전남 나주군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郡主)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玉雪) 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郡主)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聰明)하여 사물(事物)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문(文)을 성(姓)으로 삼게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파평윤씨(坡平尹氏)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辛達)은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운 명신이다. 윤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龍淵池)라고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에서 나올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지금도 윤씨들은 잉어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밀양손씨(密陽孫氏)
밀양손씨는 신라 42대 흥덕왕(826~835) 때 효자로 이름난 손순(孫順)을 시조로 한다. 손순은 흥덕왕 때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품을 팔아 노모(老母)를 봉양하였는데 어린 아들이 늘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아들을 묻으려고 취산(醉山) 북쪽으로 가서 땅을 파니 기이한 석종(石鐘)이 나왔다. 손순이 아이를 묻지 않고 종을 가지고 돌아와 종을 매달고 두드리니 그 종소리가 대궐까지 들리게 되어 왕이 사실을 조사한 후 손순의 효도를 칭찬하고 집과 곡식을 주었는데 손순은 옛집을 바쳐 절을 삼고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그 석종을 안치(安置) 하였다.
영해박씨(寧海朴氏)
영해박씨의 시조는 신라 눌지왕 때 충신인 박제상이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 때의 유명한 충신이었다. 눌지왕이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 싶어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구출해냈다. 다시 왜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왜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왜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박제상을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이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김해김씨(金海金氏)
가락국에는 본래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 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끈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있으므로 열어 보니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를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에서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 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수로(金首露,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 하였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그 중 먼저 나온 수로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으로 하였다. 이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김씨다.
김해허씨(金海許氏)
허(許)씨는 가락국 김수로 왕비 허황옥(許黃玉)에서 시작된다. 허황옥은 아유타국(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다. 그는 16세 때 배에 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에 있는 부인당(夫人堂)으로 들어와 정박했다. 그 뒤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한다. 수로왕과 허황후(許黃后)의 혼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제결혼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서 아홉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중 둘째 아들은 왕비의 소원대로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되었다. 그러니 이 설화대로라면 김씨와 허씨는 비록 성은 다르지만 같은 혈족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는 한 집안이라고 전한다.
충추어씨(忠州魚氏)
충주어씨의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본성이 지씨(池氏)였으나 태어날 때부터 체모가 기이하고 겨드랑이에 세개의 비늘이 있어 고려 태조가 어씨로 사성했다고 한다.
목천우씨(木川于氏)
목천우씨에 전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 무렵 목천(木川), 지금의 충청남도 천원군 지방 백제 유민들이 백제 부활을 간했다는 이유로 몹시 노한 왕권이 이 지방민에게 소(牛), 고끼리상(象), 돼지돈(豚), 노루장(獐) 등의 성을 억지로 붙여 주었다는데, 그 중 牛(우)씨가 뒷날 우(于)씨로 다시 우(禹)씨로 성이 바뀐다는 것이다. 옛날 책을 보면 목천상씨(木Jll尙氏), 목천돈씨(木川頓氏), 목천장씨(木川張氏)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같은 음의 다른 글자로 성을 바꾼 게 아닌가 하는 신빙성을 주기도 하지만 믿을 수는 없다.
안동권씨(安鳶權氏)
시조는 권행(權幸)이라고 한다. 권행은 원래 성이 김씨(金氏)이며, 지금의 안동인 고창(古昌)의 수령이었는데, 고려와 후백제가 충돌하자 고려 편을 들어 공로가 컸었다. 이로 인해 권행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고 왕건에게서 권(權)이라는 성을 받았다. 그러니 안동권씨는 따지고 보면 그 집안이 안동김씨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안동권씨와 안동김씨는 같은 혈족이라 하여 서로 혼사하지 않는다. 성이 다르면서도 혼사할 수 없는 집안이다.
천씨(天氏)
천씨의 본관은 연안(延安), 우봉(午峯)인데, 설화에 의하면 연안 지방에서 냇가에 버려진 한 아이가 있어 동네 사람이 거두어 길렀는데,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므로 성을 천(天)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제갈씨(諸葛氏)
제갈씨는 원래 중국에서 우리나라 신라 덕흥왕때 건너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고종때에 이르러 제갈홍(諸葛泓), 제갈형(業葛灐)의 두형제가 복성(復姓)을 서로 한자씩 나눠 쓰기로 하여 형은 제씨 아우는 갈씨로 분종했다 한다. 그러다가 구한말(舊韓未)에 이르러서 성씨 환원운동이 일어나 일부 제씨와 갈씨가 다시 제갈씨(諸葛氏)로 복성했다고 한다.
서문씨(西門氏)
본관은 안음(安驗) 단본인데, 이 성은 중국 정나라 대부(大夫)가 살던 지명을 따서 지은 성씨다. 시조 서문담은 고려 공민왕때 원나라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