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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조 채송년(蔡松年)의 자(字)는 천로(天老)다. 채송년은 아버지 채영이며 어머니는 충주지 씨 문충공 지자심의 딸이다. 그는 고려 고종때 추밀승선(樞密承宣)을 지냈고 홍주(洪州)에서 일으킨 최향(崔珦)의 난 때 병마사(兵馬使)로 난을 평정하였고, 고종18년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에는 북계병마사(北界兵馬 使)로 이를 막은 공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그 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ㆍ수태사(守太師)ㆍ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ㆍ상호 군(上護軍)ㆍ판이부사(判吏部事)ㆍ태자태사(太子太師)등을 역임하였고, 경평(景平)이라 시호 (諡號)되었다. 시조 채송년(蔡松年)의 묘소가 강원도 평강군(平康郡) 유진면(楡津面)에 있으며, 후손들이 평 강(平康)을 본관으로 삼아 계대(系代)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 채송년은 충주지씨 문인 지자심 의 외손자입니다. 채(蔡)씨의 원뿌리는 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 채국(蔡國)에 봉(封)함을 받은 주문왕 (周文王)의 일곱째 아들 채숙도(蔡叔度)다. 후손 채원광(蔡元光)이 신라(新羅) 내물왕(奈勿 王)(356~402)때 신라에 와 내물왕의 부마가 되고 우리나라 채(蔡)씨의 비조가 되었다고 전한 다. 입증할 문헌이 없어 확인할 길은 없다. 평강(平康)과 인천(仁川)분파의 정확한 연대도 확실치 않다. 고려(高麗) 의종(毅宗) 24년(1170)〈정중부(鄭仲夫)의 난(亂)〉때 문신들이 대량 학살 당하 고 문헌들이 흩어진 탓이다. 평강채씨(平康蔡氏)는 최충헌(崔忠獻)집권시 발탁해 고종(高宗)(1214~1259)때 문하시랑평장 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에 오른 채송년(蔡松年)을 시조로 하고 있다. 채송년(蔡松年)의 두 아들 정(楨)(평장사(平章事))ㆍ화(華)(평장사(平章事)), 손자 인규(仁 揆)(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ㆍ모(謨)(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ㆍ성(誠)(동(同)), 증 손 종린(宗璘)(정승(政丞))ㆍ홍철(洪哲(동(同))등 모두가 재상의 위치에 올라 〈8정승〉을 배 출해냈다. 채(蔡)씨는 조선(朝鮮)시대 채세영(蔡世英) 채유후(蔡裕後) 채제공(蔡濟恭) 등 명신ㆍ명상을 낳아 더욱 빛났다. 임진당(任眞堂) 채세영(蔡世英)은 여말(麗末)의 정승(政丞) 채종린(蔡宗璘)의 7대손으로 중종 (中宗)~명종(明宗)때 벼슬하여 호조판서(戶曹判書)ㆍ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중종(中宗)14 년(1519)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士林)에 화(禍)를 입게 되 자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었던 체세영은 즉시 입궐, 정광필(鄭光弼)(영의정(領議 政)), 남곤(南袞)(예조판서(禮曹判書)) 등에게 사건의 원인을 물었으나 대답치 못하자 승지 (承旨)들로부터 사필(史筆)을 빼앗아 든 채 중종에게 “저는 간신(諫臣)이 아니어서 소임밖 의 일을 아뢰는 것은 죄가 되나 이 자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러는지 죄명을 듣고 싶습 니다.”라고 말해 ‘임금 앞에서 사필을 빼앗은 사람’이란 별칭을 들었으며, 기묘(己卯)ㆍ을 사사화(乙巳士禍)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 체세영만은 홀로 남았다. 채유후(蔡裕後)는 인조(仁祖) 1년(1623) 문과(文科)에 장원, 효종(孝宗) 때 대제학(大提學)ㆍ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현종(顯宗) 초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명신이다. 명재상(名宰相)으로 이름을 떨친 채제공(蔡濟公)은 영조(英祖)19년(1743) 문과(文科)에 급 제, 정조(正祖) 초에 이르기까지 도승지(都承旨)와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남 인(南人)의 영수였던 그는 정조(正祖)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우의정(右議政)ㆍ영의정(領議政) 에 이르기까지 10여년 동안 재상(宰相)의 자리를 지키며 정치(政治)ㆍ경제(經濟)ㆍ사회(社會) ㆍ문화(文化) 등 각 분야에 두루 업적을 남겼다. 특히 당시에 정치ㆍ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천주교(天主敎)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채(蔡)씨가는 채홍국(蔡弘國)ㆍ채우령(蔡禹齡)ㆍ채인달(蔡仁達) 등 33인이 호남(湖南)등지에 의병으로 활약, 왜구(倭寇)와 싸우다 순국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채성귀(蔡聖龜)가 끝까지 항거를 주장하다 마침내 화친(和親)이 이 루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등, 의절(義節)의 기골도 채씨네의 존통이라고 할 수 있 다. 숙종(肅宗) 때 채이장(蔡以章)은 민비(閔妃) 폐비의 부당함을 간언하다 유배당하기도 했다. 일제하(日帝下) 채상덕(蔡相悳)은 제주(濟州)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집안현(輯安縣) 우마 령(右馬嶺)에서 일군(日軍)의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소설가 채만식(蔡萬植)은 채씨의 문재(文才)를 빛냈으며, 작곡가 채동선(蔡東鮮)은 여러 편 의 예술가곡으로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개척자 가운데 한사람이 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