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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는 광주안씨.순흥안씨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 범죄행위로 모독하므로 그 죄과를 폭로합니다. 고찰한 문헌자료: 가. 죽산안씨족보: 1976년죽산안씨대동보. 1999년죽산안씨대동보. 1917년(丁巳)죽산안씨세보.1923년(癸亥)죽산안씨세보. 나. 역사서: 삼국사기(신라본기). 고려사. 동사강목. 신당서. 자치통감. 다. 죽산안씨측 자료: 안씨원류(‘05.8.27.죽산안씨대종회). 죽산안씨대종회보 7.8.10호(죽산안씨대종회'00.3.31. '00.12.31. '05.5.) 죽산 광주 죽성안씨의 3형제를 고증하는 문헌과 고성이씨 득성유래('07.4.8. 안국승씨 작성) *죽산안씨대종회 회장 안국승씨가 제공한 문건임. 라. 종합계보류서: 씨족원류(조종운 1680년찬).청구씨보. 만성대동보. 만가보. 조선씨족통보(윤창현 1924년찬). 한국족보대전. 성씨의 고향. 마. 백과사서류: 대동운부군옥(권문해. 1582년간행). 증보문헌비고(1908년 대한제국홍문관). 1. 죽산안씨 시조와 시조의 선계(先系)의 허구. 죽산안씨는 시조의 아버지가 중국의 당나라 종실사람 이국정(李國貞)의 아들 이원(李瑗 )이라 하는데. 당나라 종실 국정의 아들은 이기(李錡). 이일(李鎰). 이풍사(李豊士). 이풍기(李豊器).로 4명이 있으나 두 아들은 국정이 사사명(史思明)의 반란에 반군 장수 왕진(王振)에게 잡혀죽임을 당할 때 같이 죽었고. 이기는 67세 때인 당헌종 원화2년(807년)에 당나라 조정에 항거한 반역의 죄로 그 아들 사회(師回)와 함께 죽임을 당한다. 한사람 남은 아들 이일(이기의 아우)은 국정이상의 선조가 당나라의 공신이므로 그 제사를 받들도록 용서를 받아 벌을 받지 않고 살게 하여 준다. 즉, 이원이라는 사람은 국정의 아들이 아니고 허수아비같은 가공한 인물이고, 당나라 종실이라는 주장은 거짓이니 죽산안씨대동보는 위보(僞譜.거짓족보)임을 그 근원부터 거짓임을 자백(自白)하는 것이다. 또한, 고성이씨(固城李氏)시조인 이황(李璜)이 이원의 아우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고성이씨 시조 이황은 고려중기 1033년대 사람이다. 2. 죽산안씨측 소위 죽산안씨동원보 라는 기록의 허위. 이원. 이황이 형제로 당 헌종 원화2년(신라 애장왕7년. 정해. 807년)에 동쪽으로 건너와서 송악산 아래에 살면서, 신라 헌덕왕7년. 헌덕왕14년에 소요, 반란에 참전한 전공을 말하나, 역사사실에 이들의 기록도 없고. 그 소요,반란기록에 전혀 부합치 아니하며. 이 전공으로 이원이 안씨성(安氏姓)을 받았다하나(賜姓) 역사사실에 없는 허위이며. 이원의 아들 3형제가 신라 경문왕4년 갑신외란(甲申外亂)에 난을 평정한 공로가 있다하나, 경문왕4년에 외란이나 왜란 같은 것도 없었으니 허위이다. 허위의 공로로 이름을 바꾸고, 죽산군(竹山君). 광주군(廣州君).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받았다는데 신라 경문왕 당시에 죽산. 광주. 죽성등의 지명(地名)이 없었고. 신라 당시 일반백성에게 봉군하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즉, 이런 모든 내용들이 전부가 거짓이다. 3. 죽산안씨 족보 간행내용에서 거짓. 죽산안씨측은 1976년까지 죽산안씨 두문중이 준(濬)과. 또 영의(令儀)를 각각의 시조로 하여 두개의 죽산안씨로 이어오다가. 준을 시조로하는 문중이 죽산안씨세보(1923년 癸亥)에 죽산안씨라는 안윤채(安潤采) 가록(家錄)이라 하면서 중국사람 이원이 동(東)으로 온 일과 안방준(安邦俊)과 국보(國輔).국필(國弼). 두사람이하 4-6인의 가공인물을 자손이라고 별도로 기록하고. 이를 " 믿지 못 한다(尙難徵信)"고 하면서 범례에 기록하였다.이것이 소위 죽산안씨동원보라 하는 기록이다. 죽산안씨 준계(濬系)는 처음 족보(1744년 甲子)를 간행할 때 조종운의 씨족원류를 베껴다 기본으로 하고 가승등을 참고하였음을 그 서문과 범례에서 명기하였고 시조는 준(濬.)으로 하였다. 또 다른 죽산안씨인 영의계(令儀系)는 1805년(乙丑)에 처음족보를 간행하는데 안성흠(安聖欽)씨가 서문을 썻는데 영의를 시조로 하였음을 본다. 이와같이 죽산안씨 두문중은 시조를 준. 영의로 하여 족보에 1744년. 1805년 이후 각각 씨족사를 이어 온 것이 확연하다. 두문중은 각각의 시조로 하여 씨족사를 이어오다가 어떤 필요가 있는지, 조선씨족통보. 증보문헌비고의 기록과 1923년(癸亥) 죽산세보의 안윤채가록을 각색(刻色)하여 1976년(丙辰)에 대동보를 만들며 이원이란 가공인물의 아들이라는 역시 가공인물인 안방준(安邦俊)을 시조로 하여 두 문중을 하나로 합쳐 족보를 만든것이다. 결국 종전의 시조인 준과 영의는 7세손.9세손이 되어버렸다. 이어서 1999년(己卯)에 다시 대동보를 만들면서 1976년 대동보기록의 허위부분을 보완한다면서 이원이 당나라 종실사람이라고 결정적인 거짓을 만들어냈다. 4. 기타 거짓된 주요기록. 또, 죽산안씨측의 위보조작에 역할한 안윤채(安潤彩.采)라는 죽산안씨 사람이라면서 죽산안씨족보의 자손록(子孫錄)에 이름이 없다.안윤채라는 사람도 역시 가공의 인물로 의심한다. 조선씨족통보와 1923년의 죽산안씨세보에. 안윤채가 말하는 려말어본고보(麗末御本古譜). 안윤채가록이라는 이름의 기록물이 1923.4년에 등장하는데 불과 80여년이 지난 지금은 없으니 거짓으로 본다. 죽산안씨 측이 시조의 형제라고 주장하는 광주안씨. 순흥안씨 후손들과 고려 중기이후. 조선조 때. 서로 혼인(婚姻)을 맺었으니 당시의 사회풍기(社會風紀)에 동성동족(同姓同族)이 혼인이 불가능한 사실에 비추어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즉, 아무 관련없으니 혼인을 한 것 아닌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