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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최한수       본관 :       작성일 : 2008년 02월 26일(화) 18:06
  • 제 목 : 족보는
  • 한민족은 한씨 조선의 후손들임.
    우리 민족은 모두 왕들이 사용하던 성씨를
    사용함으로 모두 왕족임.
    자신의 10대 조상만이라도 보면 부모, 조부, 외조부 등 등을
    모두 거슬러 올라가면
    왕족의 핏줄이 있음.
    그러므로 성씨에 너무 구애 받지 말도록 합시당..
  •  
    최한수 조선(朝鮮)건국사, 여진족(女眞族) 이성계(李成桂)와 함흥(咸興) 나의 고향 함흥(咸興) 이야기 ‘1991년 고향 함흥에 다녀와서’ * 註 : 이 essay는 \"재미서울대동창회보\", \"서울공대 토목과 동창회보\", \"永生 동창 회지\"에 연재한 바 있음니다. * 내 고향 땅의 위치를 살펴보자면, 백두산 천지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부전령[赴戰嶺]을 만나 南西로 가면 부전고원[赴戰高原]이 있고 고원 동쪽에는 부전호[赴戰湖]가 자리잡고 西쪽에는 장진호[長津湖]가 위치하고 이 두 호수에서 물이 성천강[城川江]에 흘러 들어 이 강이 남으로 내려가 함흥평야를 지나서 동해로 흐른다. 이곳 함흥이 바로 내 고향이다. 1926연에 일본의 투자가 \"노구찌\"[野口]가 부전고원에 있는 부전호와 장진호의 두 호수 물을 턴넬을 뜷어서 함흥평야에 있는 성천강에 흐르게 하여 그 낙차를 이용하여 수력발전소를 건설했고, 이 전력을 이용해서 흥남에다 일본질소비료 공장을 건설하였다. 한 편 이 성천강의 물을 함흥평야에 관개용수하여 밭농사를 논농사로 개량시켰다. 이 함흥 땅은 고대 우리 역사상 삼한시대부터 백제, 신라, 고구려, 그리고 고려가 1392年에 망하기까지는 이들 왕조에 속한 바 없었고, 함흥은 여진족(女眞族)의 땅이였었다. 여진족은 백두산 북쪽의 중국 장백산맥 지대를 주요 거점지 로하여 반 농업, 반 수렵을 하면서 살아 온 민족이다. 여진족의 근세 역사와 중국과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면, 명나라 지배하에 있던 한 지방의 여진족 수장 ‘누르하치’가 명제국말에 국력이 쇠약해 가는 틈을 타서 1616년에 국호를 ‘후금’이라고 정하고 여진족 나라를 세우고 (여진족이 전에 세운 금(金)나라은 1115-1234년까지 있었으나, 몽고족 元나라에게 멸망, 원제국은 1368년에 명나라에 의해 멸망. 金이라는 국호는 이 지대에서 금(金)금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금-金”으로 하였다고함) 요동평야까지 진출하다 67세에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혼다이지’가 1636年에 후계자가 되어 국호를 대청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세력을 확장하다가 51세에 사망한 후, 여섯 살 난 아들인 순치제가 1643년 계승하자 숙부가 섭정하면서 요동과 만리장성이 있는 곳까지 점령하게되었다. 한 편 明나라에서는 사천, 하남, 호북, 섬서 등지에서 농민 봉기를 주도하던 이저성(李自成)이 혁명군을 이끌고 명(明)의 수도인 북경(北京) 자금성[紫禁城]에 입성하여 최후明의 숭정제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으나, 그 후 40 일만인 1644년에 청군이 입경하여 한족 명(明)나라를 멸망시키고, 순치제를 통합한 중국의 황제로 세우고 여진족의 청조(淸朝)제국이 시작되었다. 한족(漢族)으로부터 꾸준한 이민족, 즉 여진족 구축 항쟁을 받으면서 1912년 최후 황제 선통제 폐위까지 268 년간 중국 대륙을 통치하였다. 드디어 한족이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일으켜 1912년에 손문이 중화민국을 세우고 장개석(蔣介石)이 정권을 이어받아 중국 통일을 시도하여 여진땅 만주---(청조건국 후 만주로 부르게 되었는데 그 유래는 잘 알수 없으며, 일설에 의하면 여진족이란 한족에게 침략자란 인상 을주기 때문에 이것을 지우기 위해 불교의 지혜보살[智慧菩薩]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믿는 사람들이 산다는 의미로 문수(文殊)의 음과 뜻이 변한 만주(滿住)로 쓰다가 만주(滿洲)로 하였다고 함. 현재 중국에서는 만주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음)---를 정복 하려고 하였으나 모택동(毛澤東)과의 내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 편으로는 중국이 외세에 약화된 틈을 타서 일본이 조선과 만주를 침략했었고, 1949년에 모택동이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이 여진족 만주땅을 통합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고 모든 외국 세력을 중국대륙에서 추방하였다. 그 다음해인 1950년에 北-조선 김일성 군대가 조선을 통일을 하려고 남 으로 쳐들어 갔으나 이승만(李承晩) 정권은 미국의 도움으로 이를 막앗다. 미국군이 北-조선 압록강까지 진출하자 모택동은 1950년 겨울에 의용군을 北-조선에 파병하여 미국의 세력 확장을 막았다. 이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미국과 직접 군사 대치하는 것이 중국 안전 보장에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이 승전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 중국에 휴전 제의를 하니 이를 받아들여 1842년의 아편전쟁 에 패한 이후 백여 년간 서구 세력의 굴욕적 수모[受侮]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한(漢)민족의 자존심과 국가 권위를 회복하여 미국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1953년 휴전협정에 조인함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로 오늘날 까지도 지속 하고 있다. 이것이 내 고향 함흥의 지리정치학(geopolitics), 상으로 본 역사의 개요이다. 현재로는 자유로이 방문할 수 없는 땅에 속하고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왕조 건국 1392년을 전후해서 지정학적 역사를 살펴보면, 1260년에 몽고족인 진기스칸[成吉思汗]의 손자인 ‘쿠부라이’(元의 世祖)가 한 족 송(宋)나라를 멸망시키고 몽고족 대원제국을 건국하였으며 여진족, 거란족[契丹族]을 정복하고, 1368年에 大명제국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백 년간 강압정치를 하였다. 몽고족은 元나라를 건국하기 이전 1230년 경부터 고려 침략을 시작하였는데 고려는 40년간 강화도에서 몽고족에 대항하다 견디지 못해 1271年에 元나라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왕권을 박탈당해 ‘조-祖’ 또는 ‘종-宗’의 묘호[廟號]를 쓸 수없게 격하되어 왕자를 쓰되 왕자(王字)앞에는 충자(忠字)를 붙여 원조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忠[ ]王으로 부르게 되였다. 고려 왕비는 원(元)에서 보낸 元의 공주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세자가 출생하면 元의 궁실에 보내 길러서 고려왕으로 책봉[冊封]하게되었으니 고려말도 모르는 왕도 있었다. 이것은 일본의 조선 침략 정치보다 조금 나은 사정이었다 할까? 이와 같이 여진(女眞) 땅 함흥 지역도 역시 元나라에서 파견된 ‘다루가치’(총감격-摠監格)의 지배 하에서 강압 통치를 당했다. 그시대 이성계(李成桂)가 1333年에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로서, 고려 땅이 아닌 여진족땅 영흥(永興)--함흥에서 약 70리가량 떨어진 곳, -- 김일성 정권은 “금야”로 지명을 바꾸었다. 오백여 년 써 오던 영흥(永興)을 무슨 이유로 지명을 바꾸었을가 하는 것은 우리가 짐작할수 있다.---영흥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 부친을따라 함흥에 이주하였다. 부친 이자춘(李子春)은 元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직을 받아 종사하였다는데, 몽고족 元나라의 압정에 불만이 있던 차 元나라가쇠퇴 (衰退)하기 시작하자, 여진족(女眞族)의 권익과 여진땅을 회복하기 위한 항쟁 지도를 하였고, 아들 이성계도 합세하여 함경남도 일대를 정복하는데 많는 공로를 세웠다. 이 사실이 고려朝에 알려지게되자 1360년에 고려조 공민왕[恭愍王]이 이자춘과 협의하여 정복한 영토를 동북면이라 하고, 이자춘(李子春)은 이 돈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되니 이성계도 고려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고려는 내란이나 외침이 있을 때면 이성계의 군사를 청하여 이를 진압시켰으니 이성계는고려조에 공을 세우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고려조에서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 말엽에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대명제국(大明帝國--1386년에 주원장에 의해 건국)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여 만주 땅까지 점령하었다. 중국 대륙에서 밀려서 만주로 후태한 元나라은 明軍을 막고자 고려에 원군(援軍)을 요청하였다. 이 때 고려조는 반몽고파 이며 반元나라 파인 이성계군대를 출정케 하였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 군대와 싸울려고 하였으나, 전쟁에 불리함을 자인하고 의주(義州)북쪽 압녹강에 있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군사를 돌이다)하여 개성(開京--지금의개성)으로 돌아와 친원파인 최형[崔瑩]과 그의 일파를 숙청한 다음 공양왕[恭讓王]을 폐위시켜 고려왕조의 종말을 내리게 하고는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이왕조는 李成桂의 고향인 함흥 일대는 물론 거란족[契丹族]이 살고 있던 압록강 남부 일대와 여진족이 살고 있는던 백두산 지역과 두망강 남부 전역을 고려땅에 통합하여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조선 왕조의 통치 아래에 있던 거란족, 여진족과 고려족(韓族)은 조선족(朝鮮族)으로 통합 되여 5 백여년 동안유지 하면서, 중국 한족(漢族)의 높은 유교, 불교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들의 문화, 언어, 문자, 및 풍속을 상실하고 성명까지도 한족(漢族)의 성을 따라 개명하여 쓰게 되었다. 지금은 한자(漢字)를 한글로 대치하였다. 이외 같은 개명은 마치 여진족이 중국 한족(漢族)의 성명을 바꾼 것과 비슷한 예라 하겠다. 이리하여 새로운 의미의 韓族, 다시 말하면 다른 4 민족, 여진족(女眞族), 거란좃(契丹族), 중구의 하족(漢族), 고려 신라의(한족(韓族-朝鮮族)이 통합된 조선민족으로 오백여 년간 융합해서 살아 내려온 것이다. 다시말하면, 장백산맥 일대에 살던 여진족이 대명제국을 멸망 시키고도, 그들 여진족은 우월한 漢民族의 문명, 문화에 동화되어 자기들의 언어, 문자 등을 상실한 것과 거의 비슷한 사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 설에 의하면 이성계의 조상은 전라도 전주의 실향민으로 전전하다 고려 땅도 아닌 여진족(女眞族)땅, 반농사 반수렵 민족이 사는 함흥 지방에 이주하여 살면서 그 지방 호족이 되었다는 기록이 분명치 않은 전설이 지금까지 알려저진 것이 조선 역사상의 통설이다. 이록이없은 역사를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전설을 부정할 만한 충분한 사료도 아직은 찾지 못하고 있다. 1107년 경 고려조 전성기에 한 때 함흥평야, 홍원 일대까지 잠시 점령하였다가 여진족의 반격으로 철수한 기록은 있다. 이 시대의 중국과 함흥 일대의 정치 배경을 살펴보면, 중국은 송(宋)나 라시대(960--1279) 이며 함흥 일대의 여진족 땅은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려(遼)나라(916--1125) 가 지배하고 있다가, 다시 여진족 금(金)나라(1115-1234) 가 려(遼)를 물리치고 실지(失地)를 회복하였다. 고려가 잠시 여진 땅 함흥 지방을 점령했던 시기에 고려 한족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살았을 것이며, 고려가 철수하면서 일부 고려민들이 남아 여진족과 융합하여 사랐을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李成桂가 출생한 1333년이 이백 여년이나 세월이 흐른 후 였으니, 고려민들은 여진족으로 동화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사정을 참작해본다면 李成桂는 전주(全州)에서 유랑해서 온, 실향한 한족(韓族0이라기 보다는 그 땅에서 살아온 여진족(女眞族)일 것이 더 믿을만하다. 좀 더 다른 여건도 몇 가지 생각해 본다면, 과거의 역사에서 흔히 보듯이 하급이나 무급 사람, 다시 말 해서 비천한 사람, 상인, 농민들이 왕이나 귀족의 지위를 획득하 게되면 양반 계급의 본관을 따서 사용하는 것이 통례이다. 또는 국가에 공노를 세운 사람에게 왕이 성명을 하사(下賜-이름을 지어줌)한다. 이와 같이 李成桂도 예를 따라 본관을 全州(전수)로 한 것은 그리 이해하기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다. 李成桂가 韓族인지, 여진족인지, 그의 선조를 찾아 보는 것도 하나의 연구 과제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불행히도 남과북이 분단되어 우리 조선 역사를 올바르게 저술할 수 있는 여건(與件)를 아직 갖추어 지 지 못하고 있다. 과거 근 60 년간 南北이 분단된 관계로 南은 南대로, 北은 北대로 다른 사관에서 역사를 연구하여 왔다. 南의 사학자들은 보수적이라할까, 애국적 이라고할까, 주로 지배왕조의 역사에 치중하고, 또 정치적 압력 하에서 순수성을 상실한 사관으로 공정한 학문의 탐구가 결핍된 사정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서 南의 사학자들은 北-조선을 마음대로 왕래하며 사적이나 사료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며, 또한 제한된 사료로 역사서를 저술하고 있는 형편이다. 北도 같은 조건과 환경에 놓여 있으며 北의 사학자들도 자유롭게 南으로 왕래하며 사적이나 사료를 수집할수 없는 처지 에놓 여있어 서로가 비슷한 사정이다. 더욱이 北의 역사관은 사회,경제사(social-economics)를 위주로 하는, 유물사관적(dialectical history) 입장에서 연구하여 왔고, 뿐만아니라 南쪽보다 적극적인 조국 통일를 하여야겠다는 신념에서 애국심을 강조하는 역사서를 저술해 왔다고 보겠다. 앞으로 南과北의 사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학술 토론도 하고 상호 자유로이 南北을 왕래하며 사적을 답사하고 사료를 수집할 수 있게 되어 가장 공정하고,신빙성 있는 역사서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註: 다음은 게속 왕위에 오르기 까지 \"태조 이성계의 설화와 함흥\" 2006년 新 春 Toronto 芝 山 韓 景 燮 2008.03.0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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