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학자 신명호씨 「조선의 왕」서 밝혀
明,이성계 부친 조작 「大明 會典」 제작
200년간 수정 요구… 선조때야 해결
영조때 淸서 다시 「大淸會典」 만들어
수정본 참조 호소 겨우 관철시켜
『조선은 太宗( 태종·1367∼1422) 때부터 宣祖(선조·1552∼1608)대에 이 르는 2백여년간 明(명)과 치열한 족보전쟁을 벌였다』 소장 역사학자인 신명호씨는 최근 내놓은 「조선의 왕」(가람기획 펴냄)에서 『족보전쟁 은 조선왕실의 족보를 조작기록한 명의 공식문서 「大明會典(대명회전) 」의 정정을 둘러싸고 전개된 조선과 명의 외교전을 의미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신씨에 따르면 양국의 외교전은 명과 주변국의 역사문물을 정리한 「대명회전」이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를 고려말의 권신 李 仁任(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데서 비롯됐다. 사건의 발단은 조 선 개국 직후 명나라로 도망갔던 反(반)이성계파인 尹▦(윤이)와 李初 (이초)가 명의 힘을 빌려 이성계를 축출하고자 명에 사실을 왜곡 보고 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들은 고려말 친원파 權臣(권신)인 이인임이 이 성계와 같은 성씨라는 점을 이용해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강력한 反 明(반명)정책을 펴고 있다고 흑색선전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 해 명은 鄭道傳(정도전)의 요동정벌 정책을 수용한 조선이 국경에서 끊 임없이 명과 마찰을 일으키자,조선의 왕실족보 조작을 통해 조선의 약점 을 잡아두고자 했다.
「대명회전」의 기록 수정을 둘러싼 외교전의 출 발점은 이성계의 아들로 조선 3대왕인 태종. 명나라와 국교를 정상화한 태종은 명나라에 「대명회전」의 정정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 후 조선의 역대왕들은 「대명회전」 수정을 위한 「宗系辯誣 (종계변무)」를 주요 외교현안으로 삼아 명과 끊임없는 외교전을 펼치는 어이없는 일이 이어지게 됐다. 이같은 외교전은 14대 선조대에 이르 러서야 비로소 일단락됐다. 선조가 종계변무를 위해 파견했던 柳泓(유홍 )이 뛰어난 화술로 명을 설득해 정정된 「대명회전」을 가지고 귀국했던 것이다.
명과 2백여년간의 족보 외교전을 치러낸 조선은 영조대에 이르러 청나라와 또한번 조선왕실의 족보를 둘러싼 외교적 딜레마에 빠지 게 된다. 이 외교전은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청이 명나라의 「대명회전 」을 본떠 「大淸會典(대청회전)」을 만들려는 데서 발생했다. 조선은 청나라가 이성계의 아버지를 이인임으로 기록한 원본 「대명회전」과 이를 정정한 수정본 가운데 어느 것을 참고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영조는 조선 관련 기록은 수정본을 참고해 달라는 로비활동 을 하기 위해 청나라에 밀사를 급파했다. 어려운 국가재정에도 불구하고 7만냥의 거금을 가지고 간 사신은 책임자에게 뇌물을 제공하고 「대명 회전」의 개정내용을 「대청회전」에 수록해줄 것을 부탁했다. 영조의 외 교적 노력은 개정된 조선왕실의 족보가 「대청회전」에 그대로 실리게 되 는 성과를 거뒀다.
한편 이같은 「족보 전쟁」은 국내에서도 전개됐다 . 懷安大君(회안대군) 芳幹(방간)의 후손들은 회안대군을 왕실족보 「 璿源錄」(선원록·璿源系譜記略)에 다시 등록하기 위해 3백년간 조정을 상대로 伸寃(신원)운동을 벌였다. 회안대군은 2차 왕자의 난의 실패로 역적으로 몰려 유배지 서산에서 최후를 마친 비운의 인물. 이런 이유 로 그의 후손들은 역적의 자손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왕족으로서 누려야할 갖가지 특권들을 박탈당했으며, 왕실족보에서도 제외됐다. 회안대군 복 권을 위한 이들의 지속적인 노력은 숙종대에 진행된 왕실족보 증수작업 과정에서 관철돼 그 결실을 얻었다.
신씨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족보 를 통해 그들의 존재 이유와 방법을 가늠했다』면서 『조선시대인이 족보 에 대해 지나칠 정도 민감했던 것은 족보가 정치사회적 기능 못지않게 종교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