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모순(牟恂)
시조 모순(牟恂)은 1417년(태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간(左司諫)을 거쳐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재임동안 보릿고개에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고 문을 열어 놓아도 도둑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종기로 고생하자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낫게 하였고, 늙어서 대변을 누자 맛을 보고 환후를 알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효행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적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 모세택(牟世澤)이 병으로 눕자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간호를 극진히 했으며 약을 구하러 가던중 큰 비가 쏟아져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없자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비가 그쳤고, 상을 당한 후 강물이 불어 건널 수 없게 되자 하늘을 향해 외치니 강물이 흐름을 멈췄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절강(截江)이라는 아호(雅號)를 얻게 되었으며, 그이 효행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경남 진양군 사봉면 등건 마을 입구에다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그의 효행을 사표로 삼게 했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 하고 왕위을 천탈한 후 절강일명 명어해동 종산일발 수양동청(截江一名 明於海東 種山一髮首陽同靑, 절강이라는 한 이름이 해동을 밝히고 종산의 한 머리칼은 수양과 함께 푸르리)이라는 시을 지어보내 은근히 자신을 따르도록 회유했으나, 그는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아 진주의 삼가현(三嘉縣)에 유배되었다. 이때 모순(牟恂)은 아들 3형제 중 모수천(牟秀阡)을 데리고 귀양을 가서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모순(牟恂) : 문과(文科) 태종17년(1417)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 모두 1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
진주(晉州)은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주모씨는
1985년에는 29가구 129명, 2000년에는 285가구 97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49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