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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서씨(扶餘徐氏)
유래
시조 : 서융(徐隆)
시조 서융(徐隆)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로 전해진다. 원래 백제왕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백제가 망하자 당(唐)에 들어 갔는데 당(唐) 고종(高宗)이 서씨를 하사하고 능진도총에 임명했다고도 한다. 그후에 다시 돌아왔으나 후대는 알 수가 없다. 원손 서존(徐存)은 1세 조상인 서신일의 6대 후손으로 고려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태원군(太原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원래 성씨인 부여를 본관으로 하였다. 인물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서존(徐存)의 아들인 서청습(徐淸習)이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과 동정(同正)을 지냈으며, 손자 서효리(徐孝理)는 문림랑(文林郞)을 역임했다. 대호군(大護軍) 서찬(徐贊)은 서존(徐存)의 증손이며, 그의 손자 서춘(徐椿, 정순대부, 판내부시사)과 서복이 유명했다. 한편 서진남(徐震男)의 아들 서익(徐益)은 조선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고 천거로 군수가 되어 순문관(巡問官)으로 북방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며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올라 탄핵을 받은 이이(李珥)를 변호하는 상소를 했다가 파직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현종 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서필원(徐必遠)과 부호군(副護軍) 서경민(徐景敏)이 뛰어났고,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한 서무덕(徐武德)은 감찰(監察) 서진만(徐鎭萬)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서정훈(徐鼎勳, 1804 甲子生) : 문과(文科) 고종14년(1877) 춘당대시응제 장원급제
서도유(徐道裕, 1770 庚寅生) : 문과(文科) 순조1년(1801) 식년시 병과(丙科) 서필원(徐必遠, 1614 甲寅生) : 문과(文科) 인조26년(1648) 정시 병과(丙科) 서익(徐益, 1542 壬寅生) : 문과(文科) 선조2년(1569) 별시 병과(丙科) 서호인(徐好仁, 1614 甲寅生) : 무과(武科) 인조22년(1644) 별시 병과(丙科) 서귀남(徐貴男, 1614 甲寅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서대인(徐大仁, 1607 丁未生) : 무과(武科) 인조14년(1636) 별시 병과(丙科) 서인일(徐仁一, 1632 壬申生) : 무과(武科) 현종3년(1662) 증광시 을과(乙科) 서필후(徐必厚, 1622 壬戌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서규훈(徐奎勳, 1830 庚寅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17년(1880) 증광시 이등(二等) 등 모두 39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4명, 무과 5명, 생원진사시 22명, 율과 8명)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
부여(扶餘)는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의 옛 지명으로 소부리(所夫里: 泗沘)라 불렀고,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660년(백제 의자왕 20)에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예속되어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으며, 751년(경덕왕 10)에 이르러 부여현(扶餘縣)이라고 개칭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부여군으로 고치고 웅주(熊州: 公州) 영현에 두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공주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이후 부여현으로 조선 말까지 유지되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부여군, 1896년에 충청남도 부여군이 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홍산현(鴻山縣)·임천군(林川郡) 전역과 석성현(石城縣)·공주군 일부를 편입해서 16개 면으로 부여군이 형성되었다. 1960년 부여면(扶餘面)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부여서씨는
1985년에는 3,032가구 13,041명, 2000년에는 4,486가구 14,31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7,145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