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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서씨(利川徐氏)
유래
시조 : 서신일(徐神逸)
시조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52대왕인 효공왕 때에 아우를 지내다가 나라의 운이 다함을 알고 이천 효양산에 복성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자칭 처사라하고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서신일의 아우인 서신통의 아들 서목(徐穆)이 신라 말기에 벼슬에 뜻이 없어 남천(南川 : 현재의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복하(福河)를 건너고자 할 때 큰 비가 내렸다. 강물이 불어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어서 태조는 서목을 찾아가 강을 건널 방법을 물었다. 이에 서목이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강을 이롭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왕건은 '이섭(利涉: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다)'했다고 해서 남천(南川)을 이천(利川)으로 지명을 고치고 서목을 이천백(利川伯)으로 봉하며서 후손들이 이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서신일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의 처음 조상인 서두라(신라 개국공신)는 아성(이천의 옛이름) 대장군으로 있었고, 서신일 대에 이르러 산촌(山村)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슴 한 마리가 화살을 맞은 채 사냥꾼에게 쫓겨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므로 불쌍히 여겨 화살을 빼주고 먹이를 주며 극진히 간호해 준 다음 다시 산으로 놓아주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백발의 산신령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그대의 집에 왔던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꾼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대의 은덕으로 살게 되었으니 그대의 자손이 대대로 재상을 지내리라"고 했다. 나이 80이 되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던 그는 그날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서희(徐熙) 장군이다. 서필, 서희(徐熙), 서눌(徐訥) 3대가 고려의 재상(宰相)이 되어 내의령(內議令), 내사령(內史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배향공신이 되었다. -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 한다. 인물
서희(徐熙, 942년~998년) : 960년(광종 11)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93년(성종 12)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물리쳤다. 994년 평장사(平章事)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축출하였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서선(徐選, 1367년~1433년) : 139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427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431년 좌군도총제가 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서일(徐一, 1881~1921년)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1918년 39인의 서명으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해 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됐고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했다.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헤이룽장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해 각 군단 수령회의를 열고 헤이룽강을 건너 자유시(自由市)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고, 행동통일을 위한 단체로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그러나 1921년 8월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다수의 청년사병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는 마을 뒷산에서 자결했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희의 아들 서유걸(徐維傑)이 좌복야(左僕射), 손자인 서정(徐靖)이 판삼사사(判三司事), 증손자인 서균(徐鈞)이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현손인 서공(徐恭)이 평장사(平章事)에 올랐으며, 서순(徐淳)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역임하는 등 고려의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고려 말기의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서백윤(徐百倫, 1859 己未生) : 문과(文科) 고종24년(1887) 함경도도과 갑과(甲科) 장원급제
서학문(徐鶴聞, 1823 癸未生) : 문과(文科) 철종9년(1858) 별시 을과(乙科) 서지보(徐志輔, 1771 辛卯生) : 문과(文科) 순조10년(1810) 식년시 을과(乙科) 서극일(徐克一) : 문과(文科) 명종1년(1546) 식년시 병과(丙科) 서형(徐逈) : 문과(文科) 세종26년(1444) 식년시 정과(丁科) 서휘(徐彙, 1737 丁巳生) : 문과(文科) 영조47년(1771) 정시 병과(丙科) 서상태(徐相泰, 1825 乙酉生) : 문과(文科) 고종13년(1876) 식년시 병과(丙科) 서산보(徐山甫) : 문과(文科) 성종17년(1486) 식년시 병과(丙科) 서기홍(徐基弘, 1870 庚午生) : 문과(文科) 고종26년(1889) 알성시 병과(丙科) 서진(徐晉) : 문과(文科) 태종1년(1401) 증광시 동진사(同進士) 등 모두 101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4명, 무과 33명, 생원진사시 44명)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기도 이천
이천(利川)은 경기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인데 본래 고구려의 영토로 475년(고구려 장수왕 63)에 남천현(南川縣: 일명 南買縣)이 설치되었다. 568년(신라 진흥황 29) 신라에 의해 남천주(南川州)로 바뀌고, 604년(진평왕 26) 북한산주(北漢山州)로 개칭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황무현(黃武縣)으로 개칭하여 한주(漢州: 廣州)에 속하게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남한강에 이르자, 서목(徐穆)이란 사람이 '이섭(利涉: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다)'했다고 해서 그곳을 이천(利川)군으로 명칭을 바꾼다. 또한 태조가 군사를 이 고을에 주둔케 하여 역사(役事)를 할 때에 점을 쳐서 이로움을 얻었으므로 고을 이름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어 내렸다고도 한다. 1257년(고종 44) 영창현(永昌縣)이라 개칭하였고, 1389년(공양왕 10) 남천현(南川縣)으로 바뀌었다가 조선에 와서 다시 이천현으로 되었다. 1444년(세종 26)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현으로 강등되었고, 1623년(인조 1)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 이천군으로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음죽군이 폐지되어 이천군에 합병되었다. 1996년 이천시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이천서씨는
1985년에는 34,157가구 144,205명, 2000년에는 53,407가구 172,07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99,792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