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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손씨(密陽孫氏)
유래
시조 : 손순(孫順)
시조 손순(孫順)의 자손 손익감, 손익담, 손익원 3형제중 손익감(孫翼減)이 신라때에 공을 세워 응천(밀양의 옛이름)군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인물
중흥조(中興祖) 손긍훈(孫兢訓)이 고려 태조와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
를 크게 일으켰다. 특히 손긍훈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匪賊)을 방어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데 앞장섰다. 고려 때 천안부 판관(天安府判官)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른 손변과 평장사(平章事) 손효려(孫孝麗)가 유명했으며, 손빈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穩城)에 전승비(戰勝碑)가 세워졌고, 1340년(충혜왕 복위 1년)에 일어난 조적의 반란 때는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이를 토평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와 정당문학(正堂文學), 상장군(上將軍) 등을 거쳐 사도(司徒)에 오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현감 손중견(孫仲堅)의 증손 손책(孫策)은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수주 목사(樹州牧使)에 이르러 조선개국에 항거하다가 처형되었으며, 충혜왕을 원나라에 호종(扈從)했던 손수경(孫守卿)은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으로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문종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손서륜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457년(세조 3년) 순흥(順興)에 유배중인 금성대군(錦城大君) 및 장인인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현감 손민(孫敏)의 아들 손비장(孫比長)은 성종 때 등과하여 시무사조(時務四條)를 왕에게 상소했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監)을 찬진한 후 공조참의(工曹參議)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이르렀고, 손홍록(孫弘祿)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을 보존케 하여 역사(歷史)의 공신(功臣)으로 유명했다. 퇴계 이황의 문인(門人)으로 학명(學名)을 떨쳤던 손영제(英濟)는 선조 때 도산서원 건립 때 사재를 털어 조력(助力)했으며, 손덕심(孫德沈)과 손덕순(孫德淳)은 임진왜란 때 영천의 창암(倉巖)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이순신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골포(安骨浦) 전투에서 순절한 손응록(孫應祿)과 광해군 때의 난정을 개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던 성리학자 손기양(孫起提)이 뛰어났으며, 손상륭(孫尙隆)은 숙종 때 학행과 효성으로 명망이 높았다. 구한말에 와서는 33인의 민족대표를 주도하여 3.1운동에 참여했던 손병희(孫秉熙)가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가 되어 구한말과 일제의 암흑기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망국의 민족혼(民族魂) 을 혁신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선교사이자 항일투사인 손정도(孫貞道)는 만주로 건너가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3.1 운동 후에는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의 흥사단에 참여하여 차이석(車利錫), 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했으며 만주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쳐,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 섰던 손일민(孫一民)과 함께 밀양손씨를 빛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손석지(孫錫祉, 1761 辛巳生) : 문과(文科) 정조19년(1795) 식년시 병과(丙科)
손탁(孫晫, 1587 丁亥生) : 문과(文科) 광해군2년(1610) 식년시 을과(乙科) 손만일(孫萬逸, 1717 丁酉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정시 병과(丙科) 손영일(孫永一, 1844 甲辰生) : 문과(文科) 철종14년(1863) 정시 병과(丙科) 손영제(孫英濟) : 문과(文科) 명종16년(1561) 식년시 병과(丙科) 손고(孫顧) : 문과(文科) 세조14년(1468) 춘당대시 병과(丙科) 손집경(孫執經) : 문과(文科) 성종11년(1480) 식년시 병과(丙科) 손차면(孫次綿) : 문과(文科) 단종2년(1454) 식년시 정과(丁科) 손명래(孫命來, 1664 甲辰生) : 문과(文科) 숙종36년(1710) 증광시 병과(丙科) 손차면(孫次綿) : 문과(文科) 세조12년(1466) 발영시 삼등(三等) 등 모두 14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31명, 무과 38명, 생원진사시 72명, 의과 1명, 음양과 1명, 율과 1명)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
밀양(密陽)은 지금의 밀양시 일원에 있던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했으며 미리미동국(彌離彌東國)이 있었다고 한다.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 밀벌 또는 미리벌)이 설치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하였다. 995년(고려 성종 16)에는 밀주(密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편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군민의 모반 사건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계림부(鷄林府: 慶州)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현으로 승격하였다. 1285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밀양부로 승격하였다. 조선 1415년(태종 15)에 밀양도호부가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경상남도 밀양군이 되었다. 1918년에는 부내면이 밀양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에 밀양읍으로, 1989년 시로 승격하여 독립하였다. 1995년 밀양군이 밀양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밀양손씨는
1985년에는 58,369가구 243,473명, 2000년에는 85,333가구 274,665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306,895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