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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송씨(淸州宋氏)
    유래
     시조 : 宋有忠
    시조 송유충(宋有忠)은 여산송씨 8세손으로 고려 말 충숙왕 때 청원군(淸州君, 청주)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여산에서 분파하여 청주로 하고 있다.

    2세손 송훤(宋暄)은 조선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으며 태종 때 청백리에 채록되었다. 또한 시조 송유충의 따님은 청송 심씨 좌정승 沈德符(심덕부)에게 시집가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정경부인[正一品]이 되다.

    3세 후손 중 단종 때 대사성(大司成)을 지내던 송승은(宋承殷)이 계유정난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해지자 외직을 자청, 칠원현감(漆原縣監)이 되어 가족을 데리고 남하하던 중 김해의 산수가 아름다움을 보고 그곳 하계면 대종리에 자리를 잡고 은거한 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김해에 정착하였다.

    참고로 시조를 송춘(宋椿)으로 하는 후손들도 있다. 송춘(宋椿)의 선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고려시대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그의 아들이 송유충(宋有忠)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주송씨 종친회에서는 송춘을 가공의 인물이라고 한다. 송춘은 1977년에 편찬한 '한국인의 족보'에서 처음 나온다.
    인물
    4세 송숙형(宋淑享)은 성종 때 훈련참군(訓鍊參軍)을 지내고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김해향약(金海鄕約)을 제정했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김해부 오원(金海府五員)>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5세 송유호는 代를 이었고, 6세 송경과 7세 송창은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8세 형 송빈(宋賓)과 아우 송밀(宋密) 형제는 각각 참판공과 주부(主簿)를 지냈다.

    송빈(宋賓)은 임진왜란 때 최초의 의병장으로 군사들에게 <김해는 영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을 잃게 되고, 영남을 잃으면 나라가 모두 적의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켜야 한다>하고 성을 굳게 지켰다. 공격해 온 적을 죽도(竹島)까지 추격, 많은 전과를 올렸다. 결국 군량과 화살이 다하자 부사(府使)는 북문으로 빠져나가 진주로 가 버렸으나 그는 최후까지 4일간이나 항전하다 사절시(死節詩) 2수를 지어 놓고 순절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 받았다. 후에 송담(松潭, 송빈의 호)서원과 표충사에 배향하며 김해시 진례 첨모재의 별묘에서 불천위(不遷位)로 제향하고 있다.

    9세 송정백은 창녕 화왕산에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왜적을 섬멸한 전공으로 망우당의 동고록(同苦錄)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송정남은 첨추공으로 왜란에 소실한 남명 조식(曺植)의 신산서원을 중수하고 성찰하였다.

    이후 10세 송재현, 11세 송심, 12세 송도복, 13세 송상봉, 14세 송유증, 15세 송길, 16세 송재문, 17세 송기태, 18세 송노학, 19세 송세량, 20세 송순복, 21세 송유장에 이르고 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송처관(宋處寬) : 문과(文科) 세조12년(1466) 발영시 삼등(三等)
     송처관(宋處寬) : 문과(文科) 세종29년(1447) 중시 을과(乙科)
     송처관(宋處寬) : 문과(文科) 세종14년(1432) 식년시 을과(乙科)
     송처검(宋處儉) : 문과(文科) 세종16년(1434) 알성시 을과(乙科)
     송정백(宋廷伯, 1569 己巳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선조39년(1606) 식년시 이등(二等)
     송한준(宋漢駿, 1874 甲戌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28년(1891) 증광시 삼등(三等)
     송한영(宋漢榮, 1870 庚午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25년(1888) 식년시 삼등(三等)
    * 모두 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4명, 생원진사시 3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항렬자
    7世
    영(英)
    정(廷)
    8世
    제(濟)
    9世
    수(水)
    10世
    세(世)
    목(木)
    11世
    두(斗)
    상(商)
    12世
    이(以)
    증(增)
    13世
    은(殷)
    옥(玉)
    14世
    진(振)
    재(在)
    15世
    국(國)
    기(祺)
    16世
    태(泰)
    학(學)
    17世
    수(壽)
    시(是)
    18世
    흥(興)
    복(復)
    19世
    홍(洪)
    우(雨)
    20世
    병(炳)
    수(秀)
    21世
    22世
    -
    23世
    -
    24世
    -
    25世
    -
    26世
    -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8世孫은 7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
    청주(淸州)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청소재지이다.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시대에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685년(신라 문무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淸州)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성종 14)에는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청주는 주(州)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였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도의 군사적인 중심지도 겸하였다. 그러나 역모사건 등으로 1656~1667년, 1681~1689년, 1804~1813년, 1826~1834년, 1862~18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청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비로소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청주면(淸州面)이라 개칭하였고, 1931년에는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읍으로, 1946년에는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로 개칭하였고 1983년 전국 행정구역 조정으로 청주시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95년 동부·서부 출장소가 동부는 상당구(上黨區)로, 서부는 흥덕구(興德區)로 승격하여 현재 상당구·흥덕구 2개 구가 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청주송씨는
    1985년에는 1,746가구 7,290명, 2000년에는 2,183가구 6,94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8,171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