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순경진(荀慶震)
시조 순경진(荀慶震)은 고려 목종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조선 세조 때 자헌대부(資憲大夫) 도총부(都總府) 도총관(都總管) 사복사정(司僕寺正)을 지낸 순한양(荀漢良)이 퇴임 후 충청도 홍산(鴻山)에 거주함으로써 자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고 따라서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병신보(丙申譜)' 등 구보(舊譜)의 발문(跋文)에는 순(荀)씨가 우리나라로 들어와 신라조정에서 우복사(右僕寺)를 지낸 순자안(荀自安)을 원조(遠祖)로 삼고 있다. 그 후대의 상세한 기록이 없어 계대을 밝힐 수 없으나 고려 공민왕 때에 신돈(辛旽)의 난정을 피하여 관직을 삼갔다가 조선시대에 순한양(荀漢良)이 관직에 나감으로써 계대가 분명히 이어지게 되었다.
인물
18세손인 순성걸(荀成傑)은 조중봉(趙重峰)의 문인(門人)으로 선조 때에 진사에 합격, 임진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의 창의기병(倡義起兵)에 참여, 금산(錦山)에서 순절한 분으로 유명한 금산칠백의총(錦山七百義塚)에 묻혀 있다.
그 아들 순응윤(荀應潤)은 장사랑(將仕郞), 또 그 아들은 인조 때 진사를 했고 22세손인 순성선(荀性善)은 효종 때에 진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내려오면 특별한 관환(官宦)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큰 이유는 유명한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어 순(荀)씨가 역족(逆族)으로 몰려 처벌받게 되자 이를 면할 목적으로 대개의 순(荀)씨가 성을 바꿀 수 밖에 없어 씨족이 쇠락하게 된 데에 있는 것 같다.
세거지
시조 순경진(荀慶震) 이하 13세손인 순희필(荀希弼)까지는 경기도 파주와 황해도 장단지방에 세거했었던 듯 싶다. 그들의 묘롱지(墓壟地)가 그곳에 집중돼 있는 것이 방증이 될 듯 싶다. 그러나 14세손인 순한양(荀漢良) 이후는 충청도 홍산(鴻山)이었다. 그리고 18세손인 순성걸(荀成傑) 이후는 서천군 서천면에 세거지로 터 잡았고, 27세손인 순동출(荀東出) 이후는 보령군 미산면, 부여군 옥산면 등이 주된 세거지가 되어 왔다. 물론 옥산면은 옛 행정구역으로는 홍산현 상서면(鴻山縣 上西面)이다. 서천면(舒川面)에 세거지로 터잡은 계파는 학정공파(鶴亭公派)로 '신유보(辛酉譜, 1981)'를 보면 20세손인 순진(荀蓁) 이하 25세손까지 세거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
충남 부여군(扶餘郡)에 있는 지명으로 백제의 대산현(大山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한산(翰山)으로 고쳐 嘉林郡(林川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초에 홍산(鴻山)으로 고치고 명종5년에 한산감무(漢山監務)로서 겸하게 하였다.
조선 태종13년에 현으로 바꾸었다.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승격시켰으나 1914년에 부여군(扶餘郡)에 병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홍산순씨는
1985년에는 215가구 826명, 2000년에는 252가구 84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748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