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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신씨(高靈申氏)
유래
시조 : 신성용(申成用)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했다. 신성용의 선조는 신라의 선비로 대대로 고령에 살면서 호장을 지내왔으므로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8세손 신숙주가 익재좌리공신으로 고령 부원군에 봉해졌다. 인물
성용(成用)의 6세손 신장(申檣, 호는 암헌)과 신평(申枰, 호는 정은), 신제(申梯, 호는 회헌) 3형제의 후대에서 크게 번성하여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특히 신장(申檣)의 다섯 아들이 뛰어났다. 그중 셋째 아들 신숙주(申叔舟)는 세종 때에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으로서
훈민정음 창제에도 공이 컸다. 수양대군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제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른것을 시작으로 세조 때 좌익공신(左翼功臣), 예종 때 익대공신(翊戴功臣),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등 4대에 걸쳐 공신에 오르고 대제학(大提學, 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 벼슬), 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특히 당시에 빼어난 학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문재(文才)에 뛰어나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슬하에 아들 8형제도 모두 명성을 떨쳐 가문을 빛냈는데 그중에서 네째 신정(申瀞)은 성종때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했고, 다섯째 신준(申俊)은 대사헌(大司憲), 우참찬(右參贊) 등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올라 고양부원군(高揚府院君)에 봉해졌다. 한편 성종 때 부제학(副提學), 이조참판(吏曹參判), 경기도 관찰사(京畿道 觀察使)들을 지낸 신종호(申從濩)는 숙주(叔舟)의 손자로 일찍이 진사시(進士試), 문과(文科), 중시(重試)등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고, 시, 문장, 글씨에도 뛰어났다. 신종호의 아들 신항(申抗)은 성종의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가 되었으며 신잠(申潛) 은 간성 군수(杆宬郡守)를 역임한 후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가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관찰사(觀察使) 신면(申㴐)의 아들 신용개(申用漑)는 일찍이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종직(金宗直)에게 글을 배워 직제학(直提學), 도승지(都承旨)등에 기용되었으나 강직한 성품이 연산군(燕山君)의 비위에 거슬려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대제학(大提學)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중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當)을 거친 신광한(申光漢)은 내자시정(內資時正) 신형(申泂)의 아들로 조광조(趙光祖)등과 함께 신진사류(新進士類)로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 성균관의 으뜸 벼슬로 정 3 품)에 올랐으나 을묘사화(乙卯士禍)에 연루되어 한때 삭직되었다가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우참찬(右參贊)으로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소윤(少尹)에 속하여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위사삼등공신(衛社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우찬성(右贊成)에 올라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후 궤장(几杖, 나라에서, 국가에 공이 있는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 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실직에 있는 70세가 넘는 정 2품 이상의 문관들을 위해마련한 경로당)에 들어갔다. 한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 신말주(申末舟)는 세조가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순창으로 내려가 은거(隱居)하였다. 성종때 전주 부윤(全州府尹)과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거쳐 첨지중추부 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그의 손자 신공제(申公濟)는 중종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창원 부사(昌原府使)를 역임하며 치적(治積, 정치상으로 남긴 공적)을 쌓아 청근수령(請謹守令)으로 표창을 받았다. 지리학을 개척한 실학자(實學者) 신경준(申景濬)은 신내(申淶)의 아들로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음률, 의복, 법률, 기서에 이르기까지 통달했고, 영조때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거쳐 서산 군수(瑞山郡守)를 지냈다. 1770년 (영조 46)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여지고(與地考)」를 담당하여 그 공으로 동부 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그밖의 인물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신호(申澔)의 아들 신광수(申光洙)가 「부해fhr(浮海錄)」을 저술했고 시(時),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로 불리웠으며, 학자(學者) 신득구(申得求)는 도학(道學)과 경술(經術)이 뛰어나 많은 문집을 남겼다. 근대에 와서는 의병대장(義兵大將) 신명휴(申明休)와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신백우(申伯雨), 신홍식(申洪植) 등이 이름을 날려 가문을 빛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신광수(申光洙, 1712 壬辰生) : 문과(文科) 영조48년(1772) 기로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준(申浚, 1444 甲子生) : 문과(文科) 성종1년(1470)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상권(申尙權, 1725 乙巳生) : 문과(文科) 영조38년(1762)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종호(申從濩) : 문과(文科) 성종17년(148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종호(申從濩, 1456 丙子生) : 문과(文科) 성종11년(1480)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유(申濡, 1610 庚戌生) : 문과(文科) 인조14년(1636)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필청(申必淸, 1647 丁亥生) : 문과(文科) 숙종10년(1684)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석간(申石澗) : 문과(文科) 중종23년(1528) 여주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처수(申處洙, 1690 庚午生) : 문과(文科) 경종1년(1721)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신요(申橈, 1550 庚戌生) : 문과(文科) 선조34년(1601)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35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87명, 무과 27명, 생원진사시 192명, 역과 32명, 의과 13명, 음양과 2명, 율과 4명)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고령
고령(高靈)은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대가야국의 중심지로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 內珍朱智)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을 계승해 오다가 562년(신라 진흥왕 23) 신라에 병합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고양군(高陽郡)으로 강주(康州: 晉州)의 관할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영천현(靈川縣)으로 개편되어 경산부(京山府: 星州)에 속하게 되었다. 1175년(명종 5)에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고양군과 영천현을 고령현(高靈縣)으로 병합하고, 1895년(고종 32) 지방재정 개정으로 성주군(星州郡)과 현풍군(玄風郡)의 일부를 통합한 고령군이 되었다. 1975년 고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고령신씨는
1985년에는 27,330가구 117,362명, 2000년에는 36,250가구 116,966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29,718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