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고중연(高仲○)
장흥고씨(長興高氏 혹은 장택고씨(長澤高氏))는 고중연(高仲○)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고중연은 고말로(高末老)의 10세손으로 고려말 남쪽으로는 왜구가 출몰하고 북쪽으로는 홍건적이 침입해 오는 고려 말기적 시대상황 속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는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 2차 침입함으로써 개경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자 왕을 모시고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을 갔다. 이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장흥백(長興伯)에 봉하여졌고 본관으로 장흥을 얻었다.
- 현재는 본관을 제주로 단일화하여 '제주고씨 장흥백파(長興伯派)'이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고경명(高敬命, 1533 癸巳生) : 문과(文科) 명종13년(1558)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고종후(高從厚, 1554 甲寅生) : 문과(文科) 선조10년(1577) 별시 병과(丙科)
고맹영(高孟英, 1502 壬戌生) : 문과(文科) 중종35년(1540) 별시 병과(丙科)
고운(高雲) : 문과(文科) 중종14년(1519) 별시 병과(丙科)
고정주(高鼎柱, 1863 癸亥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증광시 병과(丙科)
고경조(高敬祖, 1528 戊子生) : 문과(文科) 명종16년(1561) 식년시 을과(乙科)
고습(高習) : 문과(文科) 중종19년(1524) 별시 병과(丙科)
고응관(高應觀, 1743 癸亥生) : 문과(文科) 정조7년(1783) 식년시 병과(丙科)
고용후(高用厚, 1577 丁丑生) : 문과(文科) 선조39년(1606) 증광시 을과(乙科)
고필상(高必相, 1854 甲寅生) : 문과(文科) 고종13년(1876) 식년시 갑과(甲科)
등 모두 5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6명, 생원진사시 41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장흥
장흥(長興)은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는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오아(烏兒)로 개칭되어 보성군에 속하였다. 고려 초에 정안현(定安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현종 때에 장흥부(長興府)로 승격되었다. 1265년(원종 6)에 다시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장흥부로 강등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수령현의 중령산에 성을 쌓고 중심지로 했으며, 1413년(태종 13)에 장흥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52년(효종 3) 장흥현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장흥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웅치(熊峙)·회천(會泉) 2개면이 보성군에 이관되었으며, 1936년 부동면(府東面)을 장흥면으로 개칭하고, 남상(南上)·남하(南下) 양면을 용산면(蓉山面)으로, 고읍면(古邑面)을 관산면(冠山面)으로 개칭하였다. 1942년 장흥면이 장흥읍으로 승격하였고, 1980년 관산면이 관산읍으로, 대덕면이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장흥고씨는
1985년에는 9,877가구 41,641명, 2000년에는 19,316가구 61,626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75,517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