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양만수(楊萬壽)
시조 양만수(楊萬壽)는 고려 때에 전서를 지냈고 공이 많아 안악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청주 양씨에서 분적해서 본관을 안악으로 하였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양정신(楊廷藎, 1627 丁卯生) : 문과(文科) 효종8년(1657) 식년시 병과(丙科)
양효중(楊孝仲)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양복심(楊復心, 1796 丙辰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4년(1867) 식년시 삼등(三等)
양민익(楊敏益, 1691 辛未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43년(1717) 식년시 삼등(三等)
양재실(楊載實, 1777 丁酉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순조31년(1831) 식년시 삼등(三等)
양택규(楊宅奎, 1765 乙酉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순조14년(1814) 식년시 삼등(三等)
양덕희(楊德禧, 1534 甲午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선조1년(1568) 증광시 삼등(三等)
* 모두 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명, 무과 1명, 생원진사시 5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황해도 안악
안악(安岳)은 황해도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양악군(楊岳郡)이라 했고 신라 때에는 장구진(長口鎭)에 속하였다. 고려 초에 안악으로 개칭되어 1018년(현종 9) 풍주(豊州)에 편입되었다가 1106년(예종 1) 감무를 두었다. 1348년(충목왕 4)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589년(선조 22)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08년(선조 41)에 다시 군이 되었다. 8·15해방 당시에는 안악읍·대원면·용순면·은흥면·대행면·서하면·안곡면·용문면·문산면 등 1개읍 8개면 113개리였다. 북한은 1952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안악군의 일부를 은천군으로 분리시켰고, 신천군의 일부를 넘겨받아 안악군의 영역을 조정하였다. 1954년에 재령군의 신환포리 일부가 덕성리로 편입되었고, 남정리 일부를 평정리로, 구와리 일부를 복사리로, 대추리 일부를 굴산리로, 노암리 일부를 한월리로 각각 편입시켰다. 1974년 에는 유설리 일부를 덕성리와 노암리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유설리는 오국리와 통합시킨 후 유설리는 폐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안악군이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안악양씨는
1985년에는 90가구 382명, 2000년에는 117가구 355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77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