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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류씨(文化柳氏)
유래
시조 : 류차달(柳車達)
시조 류차달(柳車達)은 신라(新羅) 말기에 구월산 아래의 고장 유주(儒州), 지금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묵방동(黃海道 信川郡 文化面 墨坊洞)에서 태어났는데 가세(家勢)가 심히 부호(富豪)였다. 후삼국(後三國) 시대에 고려태조 왕건(王建)이 신망을 얻어 천하를 통일하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을 정벌하려 할 즈음 군량이 부족하여 난처한 처지에 있었다. 이 때 류차달(柳車達)이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보급하여 고려(高麗) 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 이에 태조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훈호(勳號)와 대승(大丞)의 관작을 내리었다. 그 독자(獨子) 좌윤공 류효금(佐尹公 柳孝金)이 일찍이 구월산을 지나다가 큰 범을 만나 그 입 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내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범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산신령인데 무슨 물건이 목에 걸려 심히 괴롭던 중 공이 나를 구해주었으니 그 음덕으로 공의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 하였다. 문화류씨는 문간공 류공권(文簡公 柳公權: 7세손)이 고려 명종(明宗)때 정당문학(正堂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류언침(柳彦琛)과 류택(柳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현재 문화류씨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고, 총 14개파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 고종 45년(1258년) 류경(柳璥)이 당시의 세도가(勢道家)인 최의를 제거하고 무신정권을 종식시켜 왕권을 왕실에 반환하였고, 이듬 해 나라에서는 유주(儒州)를 그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文化)로 바꾸고 현으로 승격시켜 보답을 표시했다. 이로부터 본관을 문화로 삼았다. 주요 인물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황해도 신천
문화(文化)는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문화면 일대에 있던 옛 지명으로 단군(檀君) 때에는 당장경(唐藏京: 황해도 구월산 밑에 단군의 네 아들이 도읍을 정했던 곳으로 추정)이었고, 고구려 때는 궁홀현(弓忽縣) 또는 궁올현(弓兀縣)으로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궐구현(闕口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중반군(重盤郡: 載寧)의 관할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유주(儒州)로 개칭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풍주(豊州)로 다시 바뀌었으며, 1106년(예종 1)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1259년(고종 46)에 문화현으로 승격된 이래 조선시대에도 유지되었다. 시령(始寧)·문성(文城)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해주부 문화군이 되었다. 1896년 황해도로 이속되었으나 1909년에 문화군은 신천군으로 폐합되면서 문화면으로 축소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문화류씨는
1985년에는 60,911가구 255,632명, 2000년에는 87,186가구 284,083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37,314명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그동안 문화류씨가 연안차씨와 선계(先系)가 동일하다는 설(說)이 세상에 풍미했으나 그것은 최근에 보학계(譜學界)와 사학계의 엄정한 연구와 비평을 통하여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에 근거를 둔 잘못된 사실임이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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