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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이씨(光山李氏)
유래
시조 : 이정(李靖)
광산이씨는 이정(李靖)을 시조로 하고있다. 그의 8세손 이순백(李珣白)이 고려 충숙왕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서 왕이 토번(吐蕃)으로 갈때 다른 신하는 모두 도피하였으나 그가 혼자 호위하여 따랐으므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씨로 성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적이 실전되어 후손들은 그의 선세계를 확실히 알지 못하였는데 최근에 문헌의 발견으로 이정을 시조로, 이순백을 득성득관중조(得姓得貫中祖)로 하여 세보를 수정하고 있다. 인물
광산이씨의 후손인 이선제(李先齊)는 조선 세종 때의 인물로서 1419년 증광문과에 급제 1423년 "고려사"를 개수(改修)했으며 1431년 집현전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형조와 병조의 참의,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지낸후 1448년 호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에 "고려사"개찬(改撰)을 관장했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예문관제학을 지냈는데 뒤에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문종 때의 이형원(李亨元)은 1451년 증광문과에 급제, 천문학사(天文學士)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으며, 성종 때의 이달선(李達善)도 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이중호는 조선 선조 때의 인물로서 문과에 급제, 운문관검열(芸文館檢閱)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전라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이발(李潑)은 157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여러 관직을 거쳐 1583년 부제학을 역임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전라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도승지를 지냈으며, 동인의 거두로써 정철의 처벌 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여 북인의 수령이 되었고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하여 사론(士論)을 지도했다. 한편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왕도정치를 제창하여 기강의 확립에 힘쓰다가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중칠(李重七, 1846 丙午生) : 문과(文科) 고종13년(1876) 식년시 병과(丙科)
이초(李椒, 1372 壬子生) : 문과(文科) 태조2년(139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이경복(李景復, 1707 丁亥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영조23년(1747) 식년시 이등(二等) 이창우(李昌, 1744 甲子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정조7년(1783) 증광시 삼등(三等) 이재원(李在源, 1774 甲午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순조5년(1805) 증광시 삼등(三等) 이지원(李之遠, 1604 甲辰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인조13년(1635) 증광시 삼등(三等) 이인건(李仁健)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연산군1년(1495) 증광시 삼등(三等) 이진배(李瑨培, 1833 癸巳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11년(1874) 증광시 삼등(三等) 이배운(李培運, 1808 戊辰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17년(1880) 증광시 삼등(三等) 이세흠(李世欽, 1850 庚戌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1년(1864) 증광시 삼등(三等) * 모두 10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명, 생원진사시 8명) 세거지
-충북 괴산군 괴산면 검승리
-전남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 -전남 나주군 왕곡면 옥곡리 -전남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경북 고령군 성산면 -경북 달성군 논공면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光山)은 전라남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이다. 신라시대에 이르러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757년(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 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고 군현을 정비하면서 무진주를 광주(光州)로 개편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995년(성종 14) 관제개혁 때 해양도(海陽道) 소속이 되었다가 1259년(고종 46) 기주(冀州: 일명 冀陽州)라 고쳤으며, 충선왕 때 이르러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어 공민왕 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1430년(세종 12)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성종 때에는 광산현으로 강등되었고, 연산군 때 주(州)로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10년 광주면이 되었고, 1935년 광주읍(光州邑)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1988년 송정시와 함께 광주직할시에 편입되었고, 199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개편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광산이씨는
1985년에는 7,113가구 31,118명, 2000년에는 11,416가구 36,741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40,177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