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이연계(李連桂)
대흥이씨는 전주이씨 22세에서 분관하였다.
시조 이연계(李連桂)는 고려때 관직이 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을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는데 태조 이성계가 용흥(龍興, 현재의 함흥)으로 가려는 것을 만류한 죄로 예천으로 유배되었다가 태종 3년에 풀려나와 대흥군(大興君)에 봉해졌다.
전주이씨로 복원하라는 하교도 있었으나 이에 불응하고 본관을 대흥으로 하였다.
인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두루 관직자를 배출한 대흥이씨가문은 그 대표적 인물로 고려시대에 부사(府使)를 지낸 이손귀(李孫貴)를 비롯, 호군(護軍) 이종수(李從樹), 이종송(李從松),찰방(察訪) 이문규(李文奎), 대사성(大司成) 이맹선(李孟善), 대사간(大司諫) 이흥춘(李興春), 이손현(李孫賢)은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대사성(大司成)의 관직에 오른 이석화(李碩華), 참판(參判) 이규영(李圭永), 전서(典書) 이세정(李世禎), 참찬(參贊) 이효건(李孝健), 목사(牧使) 이흥발(李興發), 대제학(大提學) 이진균(李辰龜)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판관(判官)을 지낸 이운용(李雲龍), 절제사(節制使) 이즙(李楫), 감찰(監察) 이인종(李仁宗), 참판(參判) 이태인(李泰仁), 부정(副正) 이중춘(李重春), 참의(參議) 이정(李淨), 첨정(僉正) 이치선(李致善), 도정(都正)을 지낸 이의재(李儀在), 판서(判書) 이종오(李種吾)와 이기, 대사성(大司成) 이석화(李碩華) 등이 가문을 빛낸 이들이었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막수(李莫水, 1605 乙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이득신(李得新, 1611 辛亥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이산립(李山立, 1607 丁未生) : 무과(武科) 인조14년(1636) 별시 병과(丙科)
이산한(李山漢, 1589 己丑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인조8년(1630) 식년시 이등(二等)
* 모두 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무과 3명, 생원진사시 1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세거지
-경기도 강화군 송해면 상도리
-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전남 담양군
-경북 상주군 공성면
-황해도 연백군 목단면 창덕리
-황해도 재령군 은룡면 수남리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덕촌리
-평북 박천군 청룡면 일화동
-평북 초산군 고면
-평북 의주군 고관면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
대흥(大興)은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에 속한 지명으로 백제시대에는 임존성(任存城) 혹은 금주(今州)라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개칭하여 웅주(熊州: 公州)의 관할로 있었고, 청무현(靑武縣: 靑陽)과 고산현(孤山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대흥군으로 바꾸고, 1018년(현종 9) 홍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대흥현이 되었고, 1682년(숙종 7) 대흥군으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대흥군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남도 대흥군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예산군, 덕산군과 함께 예산군으로 통합되면서 대흥군은 폐지되었다. 1934년 대흥면(大興面)으로 유지하다가 예산군에 편입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대흥이씨는
1985년에는 750가구 3,050명, 2000년에는 1,054가구 3,283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4,172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