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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의 종류와 유래 성씨의 역사 족보 이야기 친인척 호칭법 국가 연대표 역대왕 연대표 성씨별 인구순위 본관별 인구순위 고사성어


     
    성주이씨(星州李氏)
    유래
     시조 : 이순유(李純由)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동생 이돈유(李敦由)와 함께 신라 경순왕 때 벼슬하여 재상(宰相)에 올랐으나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痲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구하려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이극신(李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성주의 옛 이름)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며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고려 고종 때 시조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호장을 지내면서 덕망이 높았고 이장경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할 때 공이 많아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처음에 농서이씨로 하였다.

    이장경의 5아들 장남 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차남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삼남 낭장 이만년(李萬年), 사남 참찬 이억년(李億年), 오남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이 문과에 급제하고 가세가 번성해지자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에 따라 본관을 성주라 했다.
    인물
    고려 때 이승경은 평장사가 되어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이만연(李萬年)을 비롯하여 이포(李褒)와 이인부(李仁復) 그리고 이인임(李仁任)은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이인민(李仁敏)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서 개국공신 2명을 냈고, 문과 급제자 107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이발(李潑)은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숭문(李崇文)을 비롯하여 이지활(李智活)과 이지원(李智源) 그리고 이견기(李堅基)와 이집 등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리고 이직(李稷)은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이의(李誼)와 이자건(李自建) 등은 대사헌이 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승지와 부사, 현감 등이 배출되었다.

    이조연(李兆年)은 1285년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였고 다시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인품이 근엄하고 곧아서 충심으로 간언하는 일이 많았으며 시문에 뛰어났는데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는 그의 유명한 작품이다.
    또한 이문건은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죽자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옛 친구나 문하생들이 조문을 못했는데 그는 조문하고 통곡하여 9년동안 과거를 못 보았으나 청백하기로 유명했으며 글씨에 뛰어났고 부모의 묘소에 처음으로 직접 써서 세운 한글비는 매우 유명하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직(李稙, 1567 丁卯生) : 문과(文科) 광해군10년(1618)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규진(李奎鎭, 1763 癸未生) : 문과(文科) 정조23년(1799)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유함(李惟咸, 1557 丁巳生) : 문과(文科) 선조24년(1591)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가우(李嘉遇, 1691 辛未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정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구상(李龜相, 1829 己丑生) : 문과(文科) 고종19년(1882)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함녕(李咸寧) : 문과(文科) 세종17년(1435)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이계정(李繼禎) : 문과(文科) 중종23년(1528) 여주별시 병과(丙科)
     이사겸(李思謙, 1539 己亥生) : 문과(文科) 선조7년(1574) 별시 병과(丙科)
     이자화(李自華) : 문과(文科) 연산군2년(1496) 식년시 병과(丙科)
     이삼성(李三省, 1564 甲子生) : 문과(文科) 선조32년(1599) 별시 을과(乙科)
    등 모두 50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02명, 무과 32명, 생원진사시 352명, 역과 2명, 의과 12명, 음양과 1명, 율과 2명, 주학 3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세거지
    -충북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에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다.
    -경기도 용인, 강화
    -강원도 철원, 금화군
    -충북 영동군, 괴산군
    -전북 남원군, 정읍군
    -전남 보성군
    -경북 성주군, 금릉군
    족보발간
    갑신보(1464년. 1권):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이윤손(李尹孫)이 편찬 했으며 책은 현재 전하지 않고 다만 그 서문(序文)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한국 최고의 족보 서문이다.

    계축보(1613년. 1권): 경연참찬관 이욱(李稶)이 임란뒤에 많은 탐문으로 흩어진 종친들을 규합하여 갑신보를 증보한 것으로서 귀중한 책이다.

    정묘보(1687년. 3권): 중추관수찬 이광적(李光迪)이 편찬한것으로 후손 이준(李竣)이 계축보를 교정할 때에 갑신보를 필사하여 간직한것을 보고 증수한 것이다.

    신미보(1751년. 7권): 대사간 이응협(李應協)이 신유(1741)년에 시작하여 10년만에 펴낸 활자본이다. 이에 앞선 5권본이 있었다고 하나 미상이다.

    정사보(1797년.12권): 정와(靜窩) 이택진(李澤鎭)이 서울에 보청을 두고 편찬 하다가(어떤 문제가 있는 듯하다.) 뒤에 서화가인 감역(監役) 이한진(李漢鎭)이 보완하여 간행 하였다.

    경인보(1830년. 21권): 진사 이기흠(李箕欽),오재(梧齋),이춘우(李春遇)외 3명이 수보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한 힘을 기울인 작품으로서 전국을 거의 망라한 거보이다, 계유(1873)년에 참판 이종률(李鍾律)이 속수(續修)할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갑자보(1924년. 27권): 종손의 환향(還鄕)으로 보본사 건립과 병행된 문사인데 세덕편에 안산서원 세진록과 보본사실기가 이때에 첫권(首卷)에 수록 된 대동보로서 통상 갑자대보라고 한다. 이조혁(李祖赫),이병희 (李柄憘)가 주관 하였는데 이때에 직접 참여한 전국의 유림과 종친은 천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을미보(1955년. 5권): 종손 이봉훈(李鳳勳)공이 주관하여 편찬한 것으로 지질이나 내용이 좋지않아 반질할때 비난이 많았으므로 소장한 종친이 많지 않다.

    을묘보(1975년. 9권): 청명희 이규동(李圭東)공이 애썼으며 북한거주 일족이 미편된인쇄본인데 국역을 하지 않은것이 흠이라 하겠다.

    임술파보(1982년. 2권): 종문(宗門) 밀직공계 처음으로 편찬한 파보로서 이원혁(李源赫), 이준용(李準鎔)이 주역(主役)으로 시작하여 이동옥(李東玉)의 사서로서 이창기(李敞杞)의 명의로 46배판으로 발행한 한문본이며 [밀직공파보]라 제(題)하였다.
    항렬자

     백파(伯派) : 밀직
    20世
    ○수(秀)
    21世
    ○환(煥)
    22世
    규(圭)○
    23世
    ○현(鉉)
    24世
    ○영(永)
    25世
    木변○
    26世
    ○火변
    27世
    土변○
    28世
    ○金변
    29世
    水변○
    30世
    ○木변
    31世
    火변○
    32世
    ○土변
    33世
    金변○
    34世
    ○水변
    35世
    木변○
    36世
    -
    37世
    -
    38世
    -
    39世
    -

     중계파(仲季派) : 참지, 시중, 유수, 문열
    20世
    ○용(容)
    ○火변)
    21世
    교(敎)○
    土변○
    22世
    종(鍾)○
    金변○
    23世
    ○순(淳)
    ○수(洙)
    24世
    상(相)○
    병(秉)○
    25世
    ○희(熙)
    ○섭(燮)
    26世
    재(在)○
    규(圭)○
    27世
    ○현(鉉)
    ○석(錫)
    28世
    택(澤)○
    영(永)○
    29世
    ○식(植)
    ○근(根)
    30世
    병(炳)○
    현(炫)○
    31世
    ○기(基)
    ○배(培)
    32世
    옥(鈺)○
    용(鎔)○
    33世
    ○홍(洪)
    ○락(洛)
    34世
    병(柄)○
    계(桂)○
    35世
    -
    36世
    -
    37世
    -
    38世
    -
    39世
    -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1世孫은 20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하며 6가야연합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의 영토였다. 6세기 무렵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였다가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하여 개칭되었다.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바뀌어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경산부로 환원되었다. 1295년(충렬왕 21)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를 두어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다시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성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이후 1616년(광해군 9)에는 신안군으로, 1631년(인조 1)에는 신안현으로 개칭되어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성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는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관할면이 성주·벽진면 등 9개면으로 폐합되었고, 1979년에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성주이씨는
    1985년에는 37,251가구 153,146명, 2000년에는 58,134가구 186,188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03,703명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밀직공파(密直公派) - 이백년
    참지공파(參知公派) - 이천년
    시중공파(侍中公派) - 이만년
    유수공파(留守公派) - 이억년
    문열공파(文烈公派) - 이조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