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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의 종류와 유래 성씨의 역사 족보 이야기 친인척 호칭법 국가 연대표 역대왕 연대표 성씨별 인구순위 본관별 인구순위 고사성어


     
    수원이씨(水原李氏)
    유래
     시조 : 이자송(李子松)
    시조 이자송(李子松)은 1358년(고려 공민왕 7년) 양광(楊廣)과 전라도찰리사(全羅道察理使)가 되고, 1362년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건적의 평정을 알렸다.
    이때 원나라가 고려 공민왕의 셋째 아들을 고려왕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귀국케 할 때 그 호종(扈從)을 명령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1364년에 귀국하여 그 공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다음해 평양군으로 부임하 였다.
    또한 1382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사망한 뒤 수성(수원)부원군으로 개봉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수원에 살면서 본관을 수원으로 하고 있다.
    인물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번성하기 시작하여서 이자송의 아들 이장길(李長吉)은 대제학, 손자 이인기(李仁奇)는 판밀직사(判密直事)를 지냈으며 이인수(李仁壽)는 병조판서, 이인수의 아들 이손(李孫)은 한성부우윤, 이효신(李孝信)은 호조참판에 올랐다.
    그리고 이상(李祥)은 군수를 지냈으며 이원윤(李元倫)은 도사, 이염은 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밖에 이영(李嶺)은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사일(李士逸), 이성남(李誠男)은 부사를 역임하였고 이원휘(李元輝)는 판서, 이영석(李永碩)과 이징명(李徵明)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또한 이유환(李惟桓)과 이유제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이세만(李世萬)은 승지, 이휘백(李輝白)은 호조판서, 이형배(李亨培)는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동배(李東培)는 중추원의관을 지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희락(李希洛) : 문과(文科) 성종17년(1486) 식년시 병과(丙科)
     이경백(李景白, 1685 乙丑生) : 문과(文科) 경종1년(1721) 식년시 병과(丙科)
     이극공(李克恭) : 무과(武科) 중종8년(1513) 식년시 을과(乙科)
     이해상(李海祥, 1603 癸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이중립(李仲立, 1603 癸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이끝보(李唜福, 1596 丙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이잠(李岑) : 무과(武科) 중종35년(1540) 식년시 병과(丙科)
     이순남(李順男, 1591 辛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이천명(李天命, 1608 戊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이언일(李彦一, 1603 癸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80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명, 무과 59명, 생원진사시 6명, 역과 12명, 음양과 1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세거지
    -충남 청양군 비봉면 신원리
    -충남 청양군 비봉면 중묵리
    -경기도 화성군 팔난면 노하리
    -충남 서산군 소원면 법산리
    -평북 삭주군 외남면 청계동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기도 수원
    수원(水原)은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하며, 수성(隋城)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매홀군(買忽郡),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수성군(水城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수주(水州)로, 1271년(원종 12)에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후에 수주목(水州牧)이 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 수원부로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군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다시 도호부로 고쳤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으며, 1789년(정조 13)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의 진산인 화산(華山)으로 옮기고, 팔달산 동측으로 수원의 읍치를 이전하였다. 1793년에는 수원을 개성부·강화부·광주부와 같은 지위인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고, 1794년부터 수원성 축성을 시작하였다. 1796년에 축성을 완료하여 수원은 새로운 성곽도시로 변모했으며, 옛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오늘날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인천부 관할의 수원군으로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 수원군이 되었다. 1931년 수원면(水原面)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로 승격시키고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7년에 경기도청이 옮겨옴에 따라 수원은 명실상부한 경기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88년 구제 실시로 권선구와 장안구를 설치하고, 1993년 팔달구(八達區)를 설치하였다. 1995년 화성군 태안읍 영통리가 팔달구로, 화성군 반월면 당수리·입북리가 권선구로 편입되어 시역이 확장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수원이씨는
    1985년에는 1,434가구 6,374명, 2000년에는 1,926가구 6,269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4,872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