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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이씨(陽城李氏)
    유래
     시조 : 이수광(李秀匡)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 문종때 송나라에서 귀화해왔다.
    그가 고려에 온 유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 송과 빈번한 문화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사신으로가 화평관계를 맺는데 공을 세워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補國)으로 양성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양성으로 하였다.
    인물
    시조 이수광의 아들 이신정(李臣靖)은 이부상서에 오르고 손자 이원의(李元儀)는 승지, 증손 이영주(李英柱)는 상장군을 역임하였다. 이영주는 또 충렬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며 더욱 튼튼하게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아들 이천 또한 양성군에 봉해졌으며, 이천의 큰아들 이수방(李守邦)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인품과 재능이 영종의 눈에 띄어 직성사인(直省舍人)의 벼슬과 나해(那海)라는 이름을 받았다고한다. 그의 네아들도 모두 벼슬을 해 사람들은 "나해같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사나해(似那海)"라고 한것이 "사나이"란 말의 기원이 됐다고 후손들은 말한다.

    조선시대 인물로는 세종때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발명가인 이순지(李純之)가 있다. 그는 판중추원사에까지 올랐고 세종의 명을 받아 김담, 장영실 등과 함께 역법을 연구했고, 천문학 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산학, 천문, 풍수 등 자연과학의 대가였는데 김담과 함께 쓴 "칠정산내외편" 이 그중에도 유명하다.
    또 성종때 학자로 이름을 날린 이승소를 들 수 있다. 그는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예문관제학을 지낼 때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문집 "삼탄집(三灘集)"을 남겼다. 그는 당시 문장으로 일컫던 서거정과 어깨를 나란히 한 문인이었는데 특히 용모와 태도가 단아청정해 금옥군자(金玉君子)라고도 불렸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극형(李克亨, 1646 丙戌生) : 문과(文科) 숙종13년(1687)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승소(李承召, 1422 壬寅生) : 문과(文科) 세종29년(1447)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이진영(李晉永, 1831 辛卯生) : 문과(文科) 고종30년(1893) 별시2 을과(乙科)
     이명대(李命大, 1674 甲寅生) : 문과(文科) 숙종25년(1699) 식년시 병과(丙科)
     이흠수(李欽守) : 문과(文科) 연산군10년(1504) 별시2 정과(丁科)
     이양태(李陽泰, 1674 甲寅生) : 문과(文科) 영조19년(1743) 정시 병과(丙科)
     이겸지(李謙之) : 문과(文科) 세종5년(142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이규(李葵) : 문과(文科) 중종38년(1543) 식년시 병과(丙科)
     이예(李芮, 1419 己亥生) : 문과(文科) 세종23년(1441) 식년시 을과(乙科)
     이세영(李世英) : 문과(文科) 성종8년(1477) 춘당대시 병과(丙科)
    등 모두 185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42명, 무과 28명, 생원진사시 87명, 역과 9명, 의과 3명, 음양과 16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세거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두건리.
    4백여년 양성이씨가 터밭을 지켜온 마을이다. 백곡저수지를 막으면서 수몰되고 지금은 행정리, 건송리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저수지밑 행정리에는 마을전체 2백여 가구중 120가구 5백여명이 양성이씨이다.
    사방10리 백곡저수지 서북쪽 산기슭에는 식파정이 서있다. 조선시대에 마음의 욕망을 잠재우도록 양성해야한다는 뜻에서 식파정(息波亭)이라 이름붙인 것이라 한다.
    행정리는 마을앞 우물인 살구물의 한자식 이름이다.
    항렬자
    21世
    목(穆)○
    22世
    ○의(義)
    23世
    예(禮)○
    24世
    ○지(智)
    25世
    ○수(洙)
    26世
    래(來)○
    27世
    ○환(煥)
    28世
    규(奎)○
    29世
    호(鎬)○
    30世
    ○제(濟)
    31世
    병(柄)○
    32世
    ○찬(燦)
    33世
    기(基)○
    34世
    종(鍾)○
    35世
    ○영(永)
    36世
    상(相)○
    37世
    ○섭(燮)
    38世
    재(載)○
    39世
    ○용(鏞)
    40世
    ○한(漢)
    41世
    ○직(稷)
    42世
    성(性)○
    43世
    ○균(均)
    44世
    건(鍵)○
    45世
    ○철(澈)
    46世
    ○주(株)
    47世
    헌(憲)○
    48世
    ○민(珉)
    49世
    진(鎭)○
    50世
    ○윤(潤)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2世孫은 21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기도 안성
    양성(陽城)은 경기도 안성시(安城市) 일원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 사복홀(沙伏忽) 또는 사파을(沙巴乙)이라 불리었다.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적성현(赤城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백성군(白城郡: 安城) 관할에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양성으로 개칭했고, 1018년(현종 9)에는 수주(水州: 水原)에 병합되었다가 1175년(명종 5)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안성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안성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양성군과 죽산군이 폐지되어 안성에 병합되어 안성군이 되었다. 1937년에는 안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에 용인군 고삼면이 안성군에 편입되고, 1992년에 이죽면이 죽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98년 안성시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양성이씨는
    1985년에는 9,245가구 38,302명, 2000년에는 13,721가구 44,40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55,246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