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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이씨(驪州李氏, 여강,여흥)
    유래
    여주이씨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교위공파(校尉公派)는 고려 때에 인용교위(仁勇校尉)를 지낸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한다. 고려 때는 황려(黃驪)로 조선 때는 여흥(驪興), 여주로 사용하였으며 간혹 본관을 영의(永義)로 사용하는 지파도 있었다.

    문순공파(文順公派)는 중윤(中尹)를 지낸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고 이규보(李奎報)를 중시조로 한다. 하음(河陰. 지금의 강화)을 본관으로 사용한 지파가 있었다.

    경주파(慶州派)는 고려때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한다. 여강(驪江)을 본관으로 사용해 왔었다.

    3파 여주이씨의 시조들은 다같이 고려 중엽 부터 경기도 여주에 자리잡아 세력을 떨치던 호족들이며, 후손들은 시조는 달리하면서도 오랜 예전부터 서로 동족으로 알아 한 뿌리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해 조선시대 부터 대동보를 함께 만들어왔다.
    경기도 여주를 근거지로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은 여주를 본관으로 삼고있다.
    인물
    고려시대에 문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는 한국의 이태백(李太白)이라고 할 대문호로 고려중엽 무인들이 정권을 쥐고 설치던 때에 한자루 붓으로 나라를 움직일만한 위치에까지 올랐다. 53권의 방대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으로 엮어 전해진 그의 문학은 그의 천재와 분방한 기상을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한문을 도구로쓰는 한국문학의 수준이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수준에 올랐음을 증거한다.
    이 밖에도 공양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이행(李行)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2명의 정승, 1명의 대제학, 3명의 청백리를 냈고 호당(湖堂)에 든 사람이 2명, 군으로 봉함을 받은 사람이 5명이나 되어 명문으로써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조선전기의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학문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수많은 저술로 후배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퇴계는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일컬었고 성균관에 위패가 받들어진 동방18현이기도 하다.
    그밖에 조선후기에 실학(實學)의 중조격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근대에 종교운동에 헌신하다가 신유박해 때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등과 함께 순교한 이가환(李家煥).
    지리학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 일명 "팔역지(八域志)"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 세조 때 병조판서에 이른 이몽가(李蒙哥), 선조 때 형조, 예조판서,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이우직(李友直) 등의 유명한 문신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노신(李魯新, 1762 壬午生) : 문과(文科) 순조5년(1805)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승구(李承九, 1848 戊申生) : 문과(文科) 고종17년(1880)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언오(李彦五, 1741 辛酉生) : 문과(文科) 영조38년(1762) 식년시 을과(乙科)
     이수대(李壽岱, 1724 甲辰生) : 문과(文科) 영조50년(1774) 증광시 을과(乙科)
     이담구(李潭九, 1803 癸亥生) : 문과(文科) 헌종2년(1836) 정시 을과(乙科)
     이수관(李壽觀, 1700 庚辰生) : 문과(文科) 영조22년(1746) 정시 병과(丙科)
     이연상(李淵祥) : 문과(文科) 헌종2년(1836) 중시 병과(丙科)
     이우삼(李佑三, 1824 甲申生) : 문과(文科) 철종11년(1860) 별시 을과(乙科)
     이유수(李攸秀,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순조31년(1831) 식년시 병과(丙科)
     이능복(李能馥, 1833 癸巳生) : 문과(文科) 고종25년(1888)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33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56명, 무과 31명, 생원진사시 247명, 의과 1명, 주학 1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세거지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바로 여주이씨가 낳은 조선조 성리학의 거봉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이곳에 여주이씨가 터잡은 것은 조선초 이언적의 증조부 이숭례(李崇禮) 때 이다.
    현재 160여가구 중 100여 가구가 여주이씨이다. 인근에는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과 만년에 그가 노닐던
    독락당(獨樂堂)이 있으며 무첨당(無添堂), 향단(香壇), 관가정(觀稼亭) 등 전형적인 양반가의 한옥들이 40여채나 남아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소문난 마을이기도하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기도 여주
    여주(驪州)는 경기도 여주시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골내근현(骨乃斤縣)과 술천성(述川城)이 있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황효현(黃驍縣)으로 바뀌었고 기천군(沂川郡: 川寧縣, 述川城)의 관할에 들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황려현(黃驪縣: 黃利縣)으로 바뀌었다가 1018년(현종 9)에 원주에 영속되었다. 1257년(고종 44)에 영의현(永義縣)으로 개편되었고, 1305년(충렬왕 31)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388년(우왕 14)에 황려부(黃驪府)로 다시 승격하였다가 1389년(공양왕 1) 여흥군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401년(태종 1)에 음죽현(陰竹縣)의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驪興府)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고 1469년(예종 1)에 세종대왕 능인 영릉(英陵)을 왕대리(旺垈里)로 옮기면서 천령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驪州牧)으로 승격하였다. 1501년(연산군 7)에 여주목을 폐하고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 여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여성(驪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관할 15개 면을 9개로 통합하였고, 1941년에 여주면이 여주읍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여주이씨는
    1985년에는 15,288가구 61,907명, 2000년에는 22,517가구 71,711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84,389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