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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이씨(延安李氏)
유래
시조 : 이무(李茂)
시조는 당나라의 장수 이무(李茂)이다. 그는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던 서기 660년(신라 무열왕 7년)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따라온 중랑장(中郞將)이었다. 이무는 전쟁이 끝난 후 신라에 귀화 하였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통일신라에 기여한 그의 무공을 높이사 연안백(延安伯)으로 봉한다(후에 연안후로 가봉됨). 그러나 신라시대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각파의 중시조를 1세조로하고 있다. 후손들이 시조가 식읍으로 하사 받은 연안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물
고려시대에 태자첨사 이습홍(李襲洪), 판소부감(判少府監) 이현여(李賢呂),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이지(李漬), 대장군(大將軍) 이송(李松) 등은 연안이씨의 맥을 이어온 4대 산맥이다.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 연안이씨의 주류를 이룬다.
조선시대에 와서 총 250명의 문과 급제자와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조선의 명문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영조와 순조 때에 부자 대제학,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명성을 날리고 그와 함께 8정문(旌門)을 자랑한다. 효자 이지남(李至男)에서 부터 아들, 손자, 며느리 8명이 효부, 열녀로 정문을 받아 8정문 집안이 되었다. 이호민(李好閔)은 연안이씨가 자랑하는 외교의 명수.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조좌랑(吏曺佐郞)으로 명나라의 구원병을 끌어들이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 후 부제학(副提學)에 올라 대명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하는 등 탁월한 외교 솜씨를 발휘했다. 전란이 끝난 후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이귀(李貴)는 학자의 가문인 연안이씨의 번영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여 명실공히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선조 36년 문과에 급제, 평산부사로 있다가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하고 사직했다. 1623년 반정을 주동하여 인조를 옹립하여 이공으로 대사헌, 좌찬성에 오르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도(李○, 1609 己酉生) : 문과(文科) 인조11년(1633)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경의(李景義, 1590 庚寅生) : 문과(文科) 광해군11년(1619)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만영(李萬榮, 1679 己未生) : 문과(文科) 영조1년(1725) 정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인징(李麟徵, 1643 癸未生) : 문과(文科) 숙종5년(1679)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인원(李仁源, 1722 壬寅生) : 문과(文科) 영조26년(1750)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숭원(李崇元, 1428 戊申生) : 문과(文科) 단종1년(1453) 증광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이명곤(李命坤, 1701 辛巳生) : 문과(文科) 영조10년(1734) 춘당대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석형(李石亨, 1415 乙未生) : 문과(文科) 세종23년(1441)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이홍로(李弘老, 1560 庚申生) : 문과(文科) 선조16년(1583)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봉징(李鳳徵, 1640 庚辰生) : 문과(文科) 숙종1년(1675)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등 모두 89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50명, 무과 26명, 생원진사시 620명, 음양과 1명) 세거지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백양리.
성불산 송림 사이에 연안이씨 한 성받이들이 처마를 맞대고 모였다. 마을 전체 190여 가구 중 반수가 넘는 150여 가구 7백여명이 한 할아버지의 자손들이다. 연안이씨는 당연히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산뿐인 이 산골에 최초로 연안 이씨의 못자리를 낸 인물은 세종~성종대의 명신 이석형(李石亨)의 손자 이효장(李孝長). 약 4 백년 전 조정의 사화를 피해 첩첩산골로 은신하여 황무지를 개척하며 자손들을 번성시켰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황해도 연백
연안(延安)은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원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고염성(鼓鹽城)이라 부르다가 신라시대에 해고군(海皐郡)으로 바꾸었다. 고려에서는 염주(鹽州)·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불렀고, 1310년(충선왕 2)에 연안(延安)으로 고쳤다. 1413년(태종 13)에 연안도호부가 되었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연안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안군은 다시 배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안이씨는
1985년에는 30,274가구 126,569명, 2000년에는 44,799가구 145,440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64,036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