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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이씨(溫陽李氏)
    유래
     시조 : 이흥서(李興瑞)
    시조 이흥서(李興瑞)는 1591년(조선 선조 24년)에 옥천군수가 되어 재임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항전하다 순국하였으며 며칠 뒤 부인도 병사했다. 그래서 생후 6개월 된 그의 아들 이해(李海)는 외가에서 자라게 되어 선친 이전의 선대를 모르고 죽었다. 손자 이만립(李萬立)의 대에 이르러 난중일기에서 할아버지의 행적은 알게 되었으나 역시 선대는 알 수가 없어 이흥서(李興瑞)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온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충남 옥천군 옥천읍 대천리에있다.
    인물
    온양이씨는 조선시대 동안에 많은 관직자는 배출시키지 못했으나 많은 효자를 낳았으며 굳은 절개를 가지고 불의에 굽히지 않는 지조있는 선비를 많이 배출시켰다.
    조선 때 이원배(李元培)는 효성이 지극하여 순종으로부터 "온양이씨 계효지비(繼孝之碑)" 란 어필을 하사받아 어필각(御筆閣)이 건립되었다.
    이태귀(李泰貴)는 숙종 때 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넣어 4번이나 살아나게 했고 3년거상을 지극하게 했다.
    경응선(京應善)은 순종이 별세하자 시종관(侍從官)으로 3개월을 대궐에서 보냈고, 그후 항일운동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리고 이경선(李景善)은 공익사업에 헌신하고 한일합방 후에는 지하에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고 3.1운동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응남(李應男, 1590 庚寅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 모두 1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무과 1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세거지
    온양이씨가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은 충남 금산군이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
    온양(溫陽)은 충청남도 아산시(牙山市)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다.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탕정주(湯井州)로 승격되어 총관(摠管)이 파견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탕정군으로 강등되었으나 음봉현(陰峰縣)·기량현(祈梁縣)·평택현(平澤縣)을 영현으로 관장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 현으로 강등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현(溫昌縣)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가 1416년에 다시 온수현을 분리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왕이 온천에 행차한 후 병에 차도가 있어 온양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이후에도 역대 왕들은 이곳 온천에 자주 행차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온양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남도 온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온양군은 아산군·신창군과 함께 아산군으로 통합함으로써 폐지되었다. 1941년 관할 군내면·서면·읍내면을 합해 만든 온양면이 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 인근지역을 편입해 면적을 확장하던 온양읍이 1986년에 시로 승격, 아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을 통합하여 아산시가 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온양이씨는
    1985년에는 525가구 2,475명, 2000년에는 856가구 3,00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839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