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를 찾아서 ... |
![]() |
|
www.rootsinfo.co.kr |
성씨의 종류와 유래
성씨의 역사
족보 이야기
친인척 호칭법
국가 연대표
역대왕 연대표
성씨별 인구순위
본관별 인구순위
고사성어
![]() ![]() ![]() |
![]() 용인이씨(龍仁李氏)
유래
시조 : 이길권(李吉卷)
시조 이길권(李吉卷)은 고려시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 太師)을 지냈다. 신라말 경기도 용인지방의 토호였던 그는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합하는데 공을 세웠다. 훗날 지금의 용인인 산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용인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인물
고려 단종 때 문하시랑을 지낸 이공(李恭), 인종 때 평장사를 역임한 이현후(李鉉候), 충숙왕때 판도판서 이광시(李光時), 구성부원군을 지낸 이중인(李中仁) 등은 고려시대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중인(李中仁)은 고려조 구성부원군을 지낸 인물로 용인이씨의 굳은 절개를 보여준 장본인.그는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으로 정국이 혼란에 들자 벼슬을 버렸고 조선개국후에는 머리를 풀고 산속에 들어가 은둔했던 절신이다. 또한 자손들에게 "이씨왕조 밑에서는 벼슬하는 일이 없도록하라"며 굳은 절개의 유언을 남겼다.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3명, 청백리 1명, 판선 16명, 문과 급제자 86명을 배출했다. 이세백(李世白), 이의현(李宜顯)은 부자 정승으로 유명하고, 이일(李鎰)은 임진왜란 당시 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의 원군과 함께 평양수복에 공을 세운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광해군 때 대사간이었던 이사경(李士慶)은 당시 세력을 장악했던 대북파(大北派)에 아부하지않고 정사를 처리했던 올곧은 신하로 조신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명신이었다. 특히 순조 때의 화가로 구름, 초복, 비조(飛鳥)에 뛰어났던 이재관(李在寬)과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의철(李宜哲)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사경(李士慶, 1545 乙巳生) : 문과(文科) 선조34년(1601)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세면(李世勉, 1651 辛卯生) : 문과(文科) 숙종36년(1710) 춘당대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교악(李喬岳, 1663 癸卯生) : 문과(文科) 숙종31년(1705)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재협(李在協, 1731 辛亥生) : 문과(文科) 영조33년(1757) 정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진은(李震殷, 1646 丙戌生) : 문과(文科) 숙종4년(1678)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재간(李在簡, 1733 癸丑生) : 문과(文科) 영조35년(1759) 별시 병과(丙科) 이세재(李世載, 1648 戊子生) : 문과(文科) 숙종20년(1694) 알성시 을과(乙科) 이보행(李普行, 1718 戊戌生) : 문과(文科) 영조47년(1771) 정시2 병과(丙科) 이보온(李普溫, 1728 戊申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정시 을과(乙科) 이의철(李宜哲, 1702 壬午生) : 문과(文科) 영조24년(1748) 춘당대시 병과(丙科) 등 모두 31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86명, 무과 33명, 생원진사시 196명, 역과 2명) 세거지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
고려말엽부터 6백여 년동안 용인이씨 가문이 가풍을 이어온 동족부락이다. 입향조는 고려말의 절신 이사영(李士潁). 그는 고려가 망하자 아버지, 아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조선왕조에 항거했다. 이사영은 이곳에 터를 잡고 마을주변에 수양버들을 심어 숲을 만들고, 그 숲속에 정자를 세워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정자뜰(亭坪). 이후 후손들도 용인의 토반으로 음풍영월하며 조용히 살아왔다. 마을전체 50여 가구 250여 명이 모두 이사영의 후손들이다.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기도 용인
용인(龍仁)은 경기도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용구현(龍句縣)과 처인현(處仁縣)의 합쳐진 지명이다. 용구현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멸오현(滅烏縣)이었다가 475년(고구려 장수왕 63)에 구성현(駒城縣)이라 불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거칠현(巨漆縣: 巨黍)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주(漢州: 廣州)의 관할에 들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용구현(龍駒縣)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에 광주(廣州)의 속현으로 병합되었으나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하였다가 뒤에 현으로 승격하였다. 처인현은 수원부(水原府)의 처인부곡(處仁部曲)으로 1397년(태조 6)에 현으로 개편되었다. 1413년(태종 13) 용구·처인의 두 현을 합하여 용인으로 고치고 1896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경기도 용인군이 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양지군 일원과 죽산군(竹山郡)의 일부를 편입하여 내사면(內四面)·외사면(外四面)·원삼면(遠三面)의 3개면을 증설하였다. 1938년 관할 수여면이 용인면으로 개칭되었고 1963년 고삼면(古三面)을 안성군에 편입시켰다. 1979년 용인면이 읍으로 승격했고 1996년 용인군이 용인시로 승격되면서 용인읍은 4개의 행정동으로 분할되어 폐지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용인이씨는
1985년에는 6,572가구 27,389명, 2000년에는 9,796가구 32,050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36,306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