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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이씨(仁川李氏, 인주)
유래
시조 : 이허겸(李許謙)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김해김씨의 시조인 가락국(駕洛國, 伽倻) 수로왕(首露王)의 후손으로, 수로왕의 맏아들은 김해 김씨를 잇고 두아들은 어머니 허태후(普州太后, 보주태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되었다. 그의 후손 허기(許寄)가 755년 신라 경덕왕 때에 아찬의 벼슬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다음해에 안록산의 난으로 인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예의로써 당나라 현종을 따라 촉나라(蜀國 )로 가서 어려움과 위험을 함께 하면서 힘을 다하여 황제의 호위에 힘썼다. 다음해에 난이 평정되자 황제를 따라 서울로 되돌아오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시를 주어 칭찬하고 거듭 황제의 성인 이씨를 하사하였다. 4년만에 황제의 서신을 받들어 귀국하니 경덕왕이 그간의 공이 높고 노고가 많았음을 칭찬하며 높은 벼슬을 더하여 소성백(邵城伯)을 봉하였다. 이후 시조 허겸으로부터 10세손에 걸쳐 소성백에 계속봉해 지고 모두 이씨와 허씨 복성을 사용하였다 인천이씨와 양천허씨 족보를 합해 생각하면 허기의 후손으로 허선문(許宣文, 양천허씨의 시조), 허사문(許士文, 태인허씨 시조로 허선문의 아우로 추측, 인천이씨의 족보에는 허준으로 나타남)이 있었는데, 허사문은 수로왕비 보주태후의 30세 손으로 태조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허즙(楫, 접이라고도 읽음)과 도(棹, 이허겸)을 낳았다. 형인 허즙은 태인허씨를 잇고 동생인 도는 인천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도는 고려에서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백(上書左僕射上柱國邵城伯)으로 1500가구를 다스렸는데 소성은 곧 인천이다. 결국 양천허씨에서 태인허씨로 분리되었으며, 인천이씨는 태인허씨에서 분리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성은 이씨요 이름은 허겸으로 하여 인천이씨(경원이씨 또는 인주이씨라고도 함)의 시조가 되었다. 후에 인천이씨, 허씨, 김해김씨는 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명을 "가락종친회"라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인천시 연수동 문학산에 있으며, 매년 청명일에 향사한다. 인물
고려 때 이정, 이예(李預), 이오, 이자양(李資諒), 이자덕(李資德) 등은 평장사에 올랐으며 이공수(李公壽)와 이장용(李藏用)은 관직이 문하시중에 까지 올랐다.
이세흥(李世興)과 이극명(李克明)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이백선(李伯仙)은 좌찬성, 이원굉(李元紘)은 문하평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이인로(李仁老)는 고려 때의 대표적 문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글씨에도 능했으며 그의 저서로 "파한집(破閑集)"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관(李灌)은 이조참판이 되었고 이거와 이문화(李文和)는 예조판서, 이효인(李孝仁)은 호조판서, 이효지(李孝智)는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승안(李承安)은 좌승지, 이성동(李成童)은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이문범(李文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이시신(李時愼)과 의병을 모아 조헌(趙憲)의 진에 합류하여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정황(李廷煌)은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심양에 끌려간 아버지를 구하려고 동생 이정형(李廷炯)과 함께 심양까지 찾아가 백방으로 노력하여 아버지를 구출하여 귀국케 하니 세상사람들이 말하기를 출천지효(出天之孝)라 하였다. 구한말의 이원모(李元模)는 개화의 선구자로서 고향마을의 간석지를 막아 많은 농지를 개척한 인물로 당시 독립운동가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인물이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전수(李全粹) : 문과(文科) 세종21년(1439) 친시 병과(丙科)
이약채(李若采, 1727 丁未生) : 문과(文科) 영조37년(1761) 정시 병과(丙科) 이상운(李尙運, 1734 甲寅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식년시 병과(丙科) 이성동(李成童) : 문과(文科) 연산군1년(1495) 별시 병과(丙科) 이효신(李孝信) : 문과(文科) 세종20년(1438) 식년시 정과(丁科) 이활(李活) : 문과(文科) 세종5년(142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이관(李灌) : 문과(文科) 태조2년(139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이충범(李忠範, 1520 庚辰生) : 문과(文科) 명종13년(1558) 식년시 병과(丙科) 이시립(李時立, 1548 戊申生) : 문과(文科) 선조38년(1605) 별시 병과(丙科) 이태현(李泰顯, 1660 庚子生) : 문과(文科) 숙종13년(1687)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60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1명, 무과 13명, 생원진사시 35명, 의과 1명) 세거지
-경북 달성군 성북면에 가장많다.
-충북 보은군,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전남 보성군, 장흥군 -경북 월성군, 금릉면 -경남 의령군, 함안군, 합천군 쌍백면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인천광역시
인천(仁川)은 경기도 중서부 지역인 경기만에 돌출한 반도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미추홀(彌鄒忽) 또는 매소홀(買召忽)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소성(邵城)으로 개칭하였고, 율진군(栗津郡: 始興)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수주(樹州)에 속하였으며, 숙종 때 경원군(慶源郡), 인종 때 인주(仁州), 1390년(공양왕 2)에 경원부(慶源府)로 계속 승격되었다. 1392년(태조 1) 인주로 환원하였고,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仁川郡)이 되었으며 1460년(세조 6)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으나 숙종 때는 현으로 강등하였다가, 1698년(숙종 24) 다시 환원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인천부가 되어 인천군 등 12개군을 관할했으나, 1896년 도제 실시로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인천의 관할구역이 구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인천항의 신시가지로 축소되었고 구(舊) 인천읍과 부평이 통합되어 부천군(富川郡)이 되었다. 1949년 인천시(仁川市)로 개칭되고 1963년 부천군(副川郡) 작약도를 편입하였으며 1968년부터 구제가 실시되었다.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였고, 1995년 광역시로 개편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천이씨는
1985년에는 14,605가구 61,045명, 2000년에는 21,448가구 68,628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83,855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