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를 찾아서 ... |
![]() |
|
www.rootsinfo.co.kr |
성씨의 종류와 유래
성씨의 역사
족보 이야기
친인척 호칭법
국가 연대표
역대왕 연대표
성씨별 인구순위
본관별 인구순위
고사성어
![]() ![]() ![]() |
![]() 재령이씨(載寧李氏)
유래
시조 : 이우칭(李禹偁)
시조 이우칭(李禹偁)은 경주이씨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7세손으로 고려 초-중기에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후 황해도 재령을 녹읍(祿邑)으로 받고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경주이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재령으로 하였다. - 시조의 묘소는 황해도 재령군 서어산에 있다. 인물
고려시대에 공부상서 이원영(李元英), 영동정(令同正) 이근인(李根仁), 상장군 이소봉(李小鳳)등으로 대를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이운용(李雲龍)은 무과에 올라 옥포만호로 임진왜란을 맞아 경상수군(원균)과 전라수군(이순신)이 처음으로 합동작을 펴서 옥포대첩을 거두는데 선봉장이 되신후 임진왜란후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올라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1607년(선조 40년) 북쪽 오랑캐들이 침입하자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를 진압했고,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한 이숙은 광해군 때 군자감판관을 지냈고 이현일(李玄逸)은 숙종 때 공조참의, 예조참판,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올라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이홍훈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를 도와 창령 화왕산성(火旺山城) 등 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큰 공을 세웠다. 이정(李瀞)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여 진해, 창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후 의령현감, 상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재(李栽)는 학자로서 1713년(숙종 39년)에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를 지어 간행했고 이휘일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맹현(李孟賢) : 문과(文科) 세조6년(1460) 춘당대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이윤룡(李潤龍, 1776 丙申生) : 문과(文科) 헌종9년(1843) 식년시 병과(丙科) 이유신(李有臣, 1824 甲申生) : 문과(文科) 철종9년(1858) 식년시 병과(丙科) 이함(李涵, 1554 甲寅生) : 문과(文科) 광해군1년(1609) 증광시 병과(丙科) 이희(李憙, 1691 辛未生) : 문과(文科) 숙종45년(1719) 증광시 병과(丙科) 이상(李○) : 문과(文科) 성종17년(1486) 식년시 병과(丙科) 이징(李徵, 1527 丁亥生) : 문과(文科) 명종16년(1561) 식년시 병과(丙科) 이세후(李世○, 1681 辛酉生) : 문과(文科) 영조2년(1726) 식년시 병과(丙科) 이운(李芸) : 문과(文科) 성종14년(1483) 춘당대시 병과(丙科) 이중현(李仲賢) : 문과(文科) 성종7년(1476)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58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5명, 무과 4명, 생원진사시 39명) 세거지
경북 영덕군 영해읍 창수면 인양2동.
영해파 문중이 4백70여년간 가풍을 이어온 마을이다. 이곳에 뿌리를 내린 인물은 고려때 절신 이오(李午)의 증손자요 성종 때 부제학을 지낸 이맹현(李孟賢)의 아들 이애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장수 이여송이 이마을의 산천경관을 보고 반드시 큰인물이 나올 형세라고 감탄하고 이를 시기하여 영해부(寧海府) 시리목, 쟁이골 등의 산맥을 끊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애(王+愛)의 손자 증(贈) 이조참판 이함(李涵)이 인부를 동원, 산맥을 다시 이었고 그후 이씨문중은 당대 천석의 부를 쌓기 시작했고 여러 석학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황해도 재령
재령(載寧)은 황해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식성(息城: 漢城, 乃忽, 漢忽)이라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중반군(重盤郡)으로 개칭하였다가, 907년(효공왕 11)에 안주(安州)로 고쳤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방어사를 폐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으며, 예종(睿宗) 때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1217년(고종 4) 거란병의 침공을 막은 공으로 재령(載寧)으로 고치고 현으로 승격하였다. 1397년(태조 6) 풍주(豊州) 관하의 삼지현(三支縣)을 합하였고, 1415년(태종 15) 1천호 이상의 고을을 군(郡)으로 할 때 군수관(郡守官)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재령이씨는
1985년에는 11,060가구 45,417명, 2000년에는 16,112가구 50,940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54,166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