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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이씨(全義李氏)
유래
시조 : 이도(李棹)
시조 이도(李棹)의 초명은 치(齒)며 익호는 성절(聖節)이다. 본래 금강 유역에서 선박 수백 척을 보유하고 일본과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와 해상무역을 하는 대세력가의 호족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고자 남하하여 공주에 도착했을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강을 건너게했다. 그래서 태조로부터 도라 는 이름을 하사받고, 통합삼한개국익찬(統合三韓開國翊贊)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고 전산(全山. 현재의 전의)후에 봉해졌다. 그후 전의 계성산 아래로 이사해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 묘소는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3월 3일과 10월 2일이다. 인물
고려시대에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낸 이혼(李混)을 비롯하여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이지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지낸 이언충(李彦沖) 등 많은 관직자를 배출, 가문의 기틀을 잡았다.
특히, 이사경(李思敬)은 1356년 서북면 병마부사를 지내고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올랐다. 조선시대에 이정간(李貞幹)은 음보로 등용되어 강원도 도관찰사(都觀察使)에 이르러서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세종으로부터 궤장, 주악(酒樂)과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라는 여덟자의 친서를 받았다. 세조때의 이예장(李禮長)은 병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이덕양(李德良)은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그는 벼슬하면서 청렴으로 일관했다. 이수남(李壽男)은 1458년 문과급제하고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전산군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효석(李孝碩)은 음보(陰補)로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재임중 침입한 호적(胡賊)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명종때의 이준민(李俊民)은 1549년 문과급제하고 여러 내외직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이제신(李濟臣)은 1564년 문과급제, 1568년 사은사(謝恩使)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시문과 서예에 능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인조때의 이상진(李尙眞)은 1645년 문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우의정을 지냈고, 이천상(李天相)은 배유장(裵幼樟)에게 수학,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이황과 이재를 사숙했다. 그는 학행으로 참봉에 주어졌으나 취임하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기경(李基敬, 1713 癸巳生) : 문과(文科) 영조15년(1739)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부(李○) : 문과(文科) 연산군7년(1501)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명준(李命俊, 1572 壬申生) : 문과(文科) 선조36년(1603)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문회(李文會, 1758 戊寅生) : 문과(文科) 정조14년(1790)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운근(李雲根, 1620 庚申生) : 문과(文科) 효종1년(1650)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기경(李基敬) : 문과(文科) 영조33년(1757)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정작(李庭綽) : 문과(文科) 영조3년(1727)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효충(李效忠, 1484 甲辰生) : 문과(文科) 중종19년(1524)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의(李○) : 문과(文科) 중종16년(1521) 별시 을과(乙科) 이신(李愼) : 문과(文科) 세종20년(1438) 식년시 정과(丁科) 등 모두 665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88명, 무과 44명, 생원진사시 433명) 세거지
-경기도 성남시 구미동, 연천군 남면 선곡리
-충북 청원군 오창면 학소리, 중원군 이류면 검단리 -전북 완주군 봉동읍 낙평리, 옥구군 개정면 운회리 -전남 나주군 세지면 교산리 -경북 고령군 다산면 상곡동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의령군 유곡면 세우리 -황해도 벽성군 고산면 수정리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연기
전의(全義)는 충청남도 연기군(燕岐郡) 전의면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금지현(金地縣)으로 개칭하였고, 고려에 들어 전의현으로 고쳐 청주목에 속하게 되었다. 1413년(태종 13) 현감(縣監)을 두었으며, 1414년(태종 14) 연기현(燕岐縣)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라 하다가 뒤에 다시 분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의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 군면 페합으로 연기군(燕岐郡)에 합병되었고 일부는 전의면(全義面)으로 남아 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의이씨는
1985년에는 26,970가구 112,088명, 2000년에는 41,071가구 133,237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64,189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