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이군재(李君梓)
시조 이군재(李君梓)의 호는 벽호(碧湖)이며 경주이씨의 시조 이거명(李居明)의 17세손 이수(李蓚)의 네째 아들로 조선 태조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이군재는 태조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성천(成川)으로 유배되어 대제학(大提學)을 사임하고 그 곳에서 살며,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있는 형 이영재(李英梓)를 생각하며 본관을 진주로 삼았다고 한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치언(李致彦, 1706 丙戌生) : 문과(文科) 영조17년(1741) 식년시 병과(丙科)
이시주(李時柱, 1648 戊子生) : 무과(武科) 숙종4년(1678) 증광시 병과(丙科)
이시량(李時樑, 1651 辛卯生) : 무과(武科) 숙종4년(1678) 증광시 병과(丙科)
이득현(李得賢, 1653 癸巳生) : 무과(武科) 숙종4년(1678) 증광시 병과(丙科)
이남(李男, 1613 癸丑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이응길(李應吉, 1634 甲戌生) : 무과(武科) 숙종1년(1675) 증광시 병과(丙科)
이의건(李義健, 1631 辛未生) : 무과(武科) 현종13년(1672) 별시 병과(丙科)
이선발(李善發, 1636 丙子生) : 무과(武科) 현종7년(1666) 별시 병과(丙科)
이후광(李後廣, 1619 己未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이준원(李俊元, 1644 甲申生) : 무과(武科) 현종13년(1672)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20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명, 무과 12명, 생원진사시 7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족보발간
을축보(乙丑譜) : 1985년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
진주(晉州)은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주이씨는
1985년에는 2,926가구 13,591명, 2000년에는 3,798가구 12,636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4,410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