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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이씨(咸安李氏, 파산)
유래
시조 : 이상(李尙)
시조 이상(李尙)은 함안에 토착하여 대대로 살아왔다. 고려 고종 때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파산군(巴山君. 함안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함안으로 하게 되었다. 파산이씨(巴山李氏)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 주부동정(主簿同正)을 지낸 이원서(李元敍)를 원조(遠祖)로 하여 이탕취(李湯就), 이광주(李光柱), 이용기(李龍起)를 거쳐 시조 이상으로 이어졌다고 하나 상계(上系)는 실전되어 고증할 수 없다. 인물
고려시대에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지낸 이방실(李芳實)은 고려 공민왕 때 모거경(毛居敬) 등이 4만의 홍건적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오자 안우(安祐) 등과 함께 적을 격퇴하여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뒤에 홍건적이 다시 서해도(西海道)에 침입하자 이를 물리친 공으로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1361년에 20여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도지휘사(都指揮使)로서 안우 김득배(金得培) 등과 함께 개주(价州), 연주(延州) 등지에서 적을 요격했으나 안주(安州), 절령에서 참패, 서울이 함락되었다. 다음해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어 총병관 정세운(鄭世雲), 최형(崔瑩) 등과 함께 20만의 대군으로 서울을 포위, 적을 섬멸하고 잔적을 압록강 밖으로 격퇴해 무공으로서 가문을 빛냈다. 조선시대 대사성(大司成)에 이른 이미(李美)를 비롯, 대사헌(大司憲) 이인형(李仁亨), 집의(執義) 이의형(李義亨), 호조참판 이세응(李世應) 등의 관직자를 배출하였다. 이미는 145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진해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이름났고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으다. 이인형(李仁亨)은 1468년 무년문과에 장원, 북평사(北評事)를 지냈으며 뒤에 전라도관찰사 등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文章이 뛰어났다. 이세응(李世應)은 149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01년 문과에 급제한 후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역임한 후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으로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으며 그후 병조참지, 공조참의, 강원도관찰사, 호조참판, 평안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인형(李仁亨) : 문과(文科) 세조14년(1468) 춘당대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의형(李義亨) : 문과(文科) 성종8년(1477) 춘당대시 병과(丙科) 이미(李美) : 문과(文科) 단종1년(1453) 증광시 정과(丁科) 이대형(李大亨) : 문과(文科) 성종17년(1486) 중시 병과(丙科) 이계통(李季通) : 문과(文科) 성종3년(1472) 춘당대시 병과(丙科) 이영(李翎) : 문과(文科) 중종14년(1519) 현량과 병과(丙科) 이임(李霖) : 문과(文科) 중종19년(1524) 별시 을과(乙科) 이세응(李世應, 1473 癸巳生) : 문과(文科) 연산군7년(1501) 식년시 갑과(甲科) 이대형(李大亨) : 문과(文科) 성종11년(1480) 식년시 을과(乙科) 이진(李震) : 문과(文科) 중종32년(1537) 식년시 을과(乙科) 등 모두 3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2명, 무과 7명, 생원진사시 15명) 세거지
-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덕선리, 우산리
-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조정리 -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양화리, 송계리 -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연동, 와룡동 -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용산리 -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남산리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함안
함안(咸安)은 경상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옛 함안군과 칠원현이 합하여 이루어진 지역이다. 삼한시대 변한(弁韓)의 땅이었으며, 가야연합국 중 아시량국(阿尸良國), 아라가야(阿羅伽倻)이었다. 이후 신라에 편입되어 아시량군(阿尸良郡)이 설치되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함안군으로 개칭하였고, 현무현(玄武縣)縣)·의령현(宜寧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함주(咸州)로 승격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함안군으로 금주(金州: 金海)에 병합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고, 1373년(공민왕 22)에 다시 함안군으로 승격하였다. 1505년(연산군 11)에 함안도호부(咸安都護府)가 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함안군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함안군과 칠원군이 되었다가, 1896년의 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06년 칠원군을 함안군에 통합했으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상봉(上奉)·하봉(下奉)·상사(上寺)의 3면(面)을 진주(晉州)에 예속시키고, 영산군 길곡면(吉谷面)의 사촌리(泗村里)·금암리(金巖里) 일부 및 마산부(馬山府) 내서면(內西面) 예곡리(禮谷里) 일부를 병합하였다. 1918년에 읍내면을 함안면으로 개칭하였다. 1933년 죽남면이 군북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73년 함안군 대산면(代山面) 산서리(山西里)를 가야면(伽倻面)에 편입하였다. 1979년에 가야면이 가야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함안이씨는
1985년에는 7,792가구 31,938명, 2000년에는 11,803가구 37,597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41,064명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경력공파(經歷公派), 계공랑공파(啓功郞公派), 국헌공파(菊軒公派), 금위공파(禁衛公派), 둔재공파(遯齋公派), 매헌공파(梅軒公派), 부여공파(扶餘公派), 부윤공파(府尹公派), 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 성재공파(惺齋公派), 송암공파(松菴公派), 수사공파(水使公派), 신천공파(新川公派), 예천공파(醴泉公派), 오헌공파(梧軒公派), 운포공파(雲圃公派), 월암공파(月菴公派), 이천공파(伊川公派), 전경재공파(展敬齋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충순공파(忠順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행헌공파(杏軒公派), 홍의공파(弘儀公派), 황피공파(篁陂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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