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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이씨(咸平李氏, 함풍)
유래
시조 : 이언(李彦)
시조 이언(李彦)은 고려 광종때에 신무위 대장군(神武衛 大將軍)으로 봉해졌고, 이어 충숙왕때 고손되는 이광봉(李光逢)이 벽상삼한삼중대의 보국숭록대부 좌명공신으로 함풍(咸豊. 함평의 옛이름) 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여러대에 걸쳐 그곳에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함평으로 하였다. 인물
조선초기에 무로써 가문을 일으켜 조선시대에만 70여명의 문신, 무신을 배출하였다.
중시조는 시조의 10대손인 이종생(李從生), 그는 세조때의 무장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야인 정벌등에 용맹을 떨치고 각도의 병마절도사를 두루 역임했는데 함평이씨의 뛰어난 인물은 거의가 그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 이양(李良)장군 또한 연산군~중종 때에 전라, 충청 수군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등을 지냈던 인물이다. 이대원(李大源)은 선조16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남해안에 출몰한 왜적을 추격하여 적장을 사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흥양지방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백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3일간의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포로가 됐으나 항복을 거부하고 순국했다. 그의 충정을 기리는 뜻에서 쌍충사(雙忠祠)가 건립되었다. 선조때 이덕일(李德一)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그는 화살하나로 두명의 적을 쓰러트릴만큼 활솜씨가 뛰어나 이같은 용맹이 알려져 이순신장군의 참모로 기용되어 임진왜란을 종결시키는데 크게 공을세워 절충(折衝)장군(정3품)에 올랐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윤신(李潤身) : 문과(文科) 영조22년(174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희겸(李喜謙, 1707 丁亥生) : 문과(文科) 영조15년(1739)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휘항(李彙恒, 1695 乙亥生) : 문과(文科) 영조2년(172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장영(李長榮) : 문과(文科) 선조19년(158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만영(李萬榮) : 문과(文科) 중종33년(1538)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정운(李貞運) : 문과(文科) 정조20년(1796) 중시 을과(乙科) 이정운(李貞運, 1747 丁卯生) : 문과(文科) 정조10년(1786) 별시 을과(乙科) 이함일(李涵一, 1562 壬戌生) : 문과(文科) 선조36년(1603) 식년시 병과(丙科) 이긍(李兢) : 문과(文科) 세종9년(1427) 중시 을과(乙科) 이침(李沈, 1593 癸巳生) : 문과(文科) 인조13년(1635) 증광시 병과(丙科) 등 모두 293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78명, 무과 14명, 생원진사시 199명, 의과 2명) 세거지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함평군은 고려 충숙왕때 함평부원군에 봉해진 이광봉의 못자리를 잡은 이후 그 후손들이 7 백여년 동안 문전옥답을 가꾸며 살았다. 초포리는 마을전체 1백여가구 500여명이 모두 함평이씨이었다. 초포리에 처음 뿌리를 내린 조상은 수사(水使)를 지냈던 이춘수(李春秀)로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함평에 정착하여 후학들을 양성했다. 세종때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긍(李兢)은 그의 아들이다. 함평은 일제하에서 전남지방 항일운동의 산실로 유명해져 호남사람들이 강골촌(剛骨村)으로 꼽는 3성(장성, 곡성, 보성), 3평(함평, 남평, 창평)에 뽑히는 영예를 누릴수 있었다.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함평
함평(咸平)은 전라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함풍(咸豊)과 모평(牟平) 두개 현이 합쳐진 지명이다. 선사시대에는 진국,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백제 때 굴내현(屈乃縣: 또는 屈奈縣)·다지현(多只縣)에 속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굴내현은 함풍현(咸豊縣)으로, 다지현은 다기현(多岐縣)으로 개칭되어 무안군에 이속되었다. 고려 태조 때 다기현을 모평현(牟平縣)으로 바꾸었고, 1018년(현종 9)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다. 1409년(태종 9) 모평현(牟平縣)과 합하여 함평현으로 개편하였다. 기성(箕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함평군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 함평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10개 면으로 줄었으며, 1932년 식지면과 평릉면을 합병하여 나산면으로 신설, 9개 면이 되었다. 1963년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함평이씨는
1985년에는 24,776가구 103,697명, 2000년에는 38,852가구 125,419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38,550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