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찾기 등록
  • 국내최초 족보 전문사이트 Since 1997
  • 한국인의 뿌리와 전통을 이어갑니다
  • 뿌리를 찾아서는 국내에 현존하는 287개 성씨와 그에 따르는 3천여 개의 본관별 시조와 유래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 www.rootsinfo.co.kr
    성씨의 종류와 유래 성씨의 역사 족보 이야기 친인척 호칭법 국가 연대표 역대왕 연대표 성씨별 인구순위 본관별 인구순위 고사성어


     
    경주정씨(慶州鄭氏)
    유래
     시조 : 지백호(智伯虎)
    시조 지백호(智伯虎)는 신라 초기 6부 가운데 진지촌(珍支村)의 촌장이다.

    시조(중시조) 문정공 정진원(鄭珍原)은 지백호의 42대 손으로 고려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平章事)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월성(경주의 옛이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경주정씨가 전체 정씨(鄭氏)의 큰집 격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로곡리에 있으며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인물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정극온(鄭,정이기(부마), 정현영(鄭玄英. 호부상서), 정휘(鄭暉. 문하평리)) 등이 고려사에 올라있다. 정휘의 아들인 양경공(良景公) 정희계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참여, 조선이 들어서자 개국공신 1등으로 봉해지고 좌참찬,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 경주정씨는 15명의 문과급제자 30명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했다.
    정희계(鄭熙啓)가 잘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전사한 정발(鄭撥)은 정희계의 5대 손인 군수 정명선(鄭明善)의 아들이다. 이 밖에 세종 때 좌찬성이 추증된 정지년(鄭知年), 명종 때 성리학의 대가 정지운(鄭之雲)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벽두에 장렬하게 전사한 유명한 흑의장군 정발(鄭撥)은 25살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훈련원부정을 역임. 임진왜란이 나기 직전에 부산진 첨절제사가 되었는데, 그해 4월 왜군이 처음으로 부산에 상륙하자 다른 장수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그는 끝까지 분전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항상 검은 군복을 입고 진두에 나서 군민을 지휘하는
    장군의 모습에 왜병들이 "흑의장군"의 명칭을 붙였다. 장군의 용전사실은 왜란이 끝난 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황신(黃愼)이 왜군 平調信(평조신)으로부터 무용을 극찬하는 회고담을 듣고 돌아와 조정에 알려져 뒤늦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사당 충렬사(忠烈祠 : 부산 동래구 안락동)을 지어 배향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정효상(鄭孝常, 1432 壬子生) : 문과(文科) 단종2년(1454)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정언장(鄭○章, 1704 甲申生) : 문과(文科) 영조23년(1747) 식년시 을과(乙科)
     정승조(鄭承祖) : 문과(文科) 성종25년(1494) 별시 병과(丙科)
     정상헌(鄭尙獻, 1635 乙亥生) : 문과(文科) 현종10년(1669) 식년시 병과(丙科)
     정승빈(鄭升賓, 1704 甲申生) : 문과(文科) 영조11년(1735) 식년시 병과(丙科)
     정신남(鄭信男, 1572 壬申生) : 문과(文科) 광해군4년(1612) 식년시 병과(丙科)
     정득(鄭得, 1483 癸卯生) : 문과(文科) 명종1년(1546) 식년시 병과(丙科)
     정진명(鄭進明, 1762 壬午生) : 문과(文科) 정조19년(1795) 춘당대시 병과(丙科)
     정세현(鄭世賢) : 문과(文科) 중종20년(1525) 식년시 병과(丙科)
     정지년(鄭知年) : 문과(文科) 세종20년(1438)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182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3명, 무과 44명, 생원진사시 49명, 역과 19명, 의과 42명, 음양과 2명, 율과 1명, 주학 2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세거지
    전남 승주군 주암면 선산리.
    마늘모양으로 생긴 마을뒷산의 이름을 따서 산산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정씨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임진왜란 직후에 정광형(鄭光亨)이 순천에서 옮겨 오면서 부터이다. 이후 3 백50여년 동안 한때는 60여가구의 마을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외지로 이주했다.
    정광형의 2 대조 정빈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에 자진해서 쌀을 보내, 전쟁을 도왔고 정빈의 삼촌 정사립(鄭思立)등도 순천지방에 몰려온 왜군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싸워 공을 세웠다.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에도 이들의 무공이 기록돼어 전해진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정씨는
    1985년에는 70,670가구 300,808명, 2000년에는 94,465가구 303,443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350,587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