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정성(鄭盛)
시조 정성(鄭盛)은 정석숭(鄭碩崇:하동정씨 도정계의 기세조)의 6세손으로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하동정씨로부터 분관하여 본관을 금성으로 하고 있다.
인물
정성의 아들 정이(鄭履)가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내고 도첨의사(都僉議事)에 증직되었으며,
정지(鄭地)는 고려 공민왕 때 전라도 안무사(按撫使)를 거쳐 1377년(우왕 3년) 순천도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순천, 낙안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고 전라도 순문사(巡問使)에 올랐다. 그후 남원, 남해 등지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한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 도원수(海道都元帥), 양광(楊廣), 전라, 경상, 강릉도 도지휘치사(江陵道都指揮置使)가 되고, 1384년 문하평리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정종(鄭種)은 병조판서에 올랐고 정서는 현감, 정우직(鄭友直)과 정우현(鄭友賢)은 부호군 정팽은 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정진석(鄭鎭石)은 선전관이 되었고 정우설(鄭友卨)은 호조판서 정민은 목사, 정태로(鄭泰老)는 좌승지가 되었고 정재실(鄭在實)은 사헌부감찰가 되어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정충신(鄭忠信)은 1592년(선조 25년) 무과에 급제했고, 1621년(광해군 13년)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경비했다. 그는 1623년(인조 1년) 안주목사로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했고, 다음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크게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이 되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올라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를 겸임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 부원사(副元師)를 거쳐 그후 포도대장(捕盜大將), 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천문, 지리, 의술 등에 능통했고 청렴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세거지
충남 서산군 태안읍
전북 익산군 춘포면 오산리
전북 남원군, 담양군
전북 곡성군 석곡리
전남 장성군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
금성(錦城)은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의 옛 이름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리었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 光州)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로 목(牧), 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금성정씨는
1985년에는 2,037가구 8,976명, 2000년에는 2,112가구 6,78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9,886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