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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금씨(奉化琴氏)
    유래
     시조 : 금용식(琴容式)
    시조 금용식(琴容式)은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금응(琴應)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사(太師)를 지냈다. 그러나 금응으로부터 금용식까지의 세계를 고증할 수 없고, 또 금용식으로부터 6세 내지 8세의 세계가 실전되어 금의(琴儀)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고려 명종과 고종사이의 명신이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금학사라는 별칭을 가졌고 관직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 김포군 봉화산에 있으며 3월 9월중에 향사한다.
    인물
    금의(琴儀)의 맏아들 금기는 호부 원외랑(戶部員外郞), 둘째아들 금규는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 넷째아들 금휘는 좌우위 대장군(左右衛大將軍), 다섯째 금희는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이르렀다. 그리고 원종 때에 합문부사(閤門副使)를 지내고, 삼별초의 난 때 왕명으로 원나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한 금훈(琴熏)도 이 집안 출신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성계와 통혼하여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왕자의 난에 휘말려 곤경에 처한 후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 까닭에 겨우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는 데에 그쳤다. 금의의 후손 인배(仁誹)가 태조의 넷째아들 회안대군(懷安大君: 芳幹)을 사위로 삼아 국혼을 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朴苞)의 거짓 밀고를 믿은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방원에게 패하여 귀양가게 되자 처족인 금씨도 이의 영향을 받아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조에서 맨처음 벼슬길에 오른 금유(琴柔)는 태조조에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성품이 청백해서 그가 호남을 안찰(按察)할 때 탐학한 수령들은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그의 아들 이영(以詠)은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 사인(舍人)을 지냈는데 김종직(金宗直)이 그에게 보내는 시에 <선생의 재주는 옛사람도 비견하지 못한다>고 할 만큼 시문에 뛰어났다. 금곤(琴崑)·금숭(琴嵩) 형제는 숙(淑)의 아들로 문종조에 형제가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는 장례원 사평(掌 院司評)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였고, 뒤에 봉화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겨우 1년을 넘기고 돌아와서 학문에 정진했다. 그의 아들 업과 개도 연벽(聯壁)하여 또 한 차례 금씨의 이름을 높였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금숭(琴嵩) : 문과(文科) 문종0년(1450) 식년시 정과(丁科)
     금상현(琴尙絃, 1587 丁亥生) : 문과(文科) 인조2년(1624) 식년시 병과(丙科)
     금섬(琴暹, 1659 己亥生) : 문과(文科) 숙종16년(1690) 식년시 병과(丙科)
     금시술(琴詩述, 1783 癸卯生) : 문과(文科) 헌종10년(1844) 증광시 병과(丙科)
     금의(琴椅, 1489 己酉生) : 문과(文科) 중종14년(1519) 식년시 병과(丙科)
     금개(琴愷, 1562 壬戌生) : 문과(文科) 선조34년(1601) 식년시 병과(丙科)
     금업(琴○, 1557 丁巳生) : 문과(文科) 선조34년(1601) 식년시 병과(丙科)
     금유(琴柔) : 문과(文科) 태조5년(1396) 식년시 병과(丙科)
     금성규(琴聖奎, 1636 丙子生) : 문과(文科) 숙종4년(1678) 정시 을과(乙科)
     금충달(琴忠達, 1594 甲午生) : 문과(文科) 인조2년(1624) 증광시 병과(丙科)
    등 모두 68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4명, 무과 2명, 생원진사시 52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항렬자
    26世
    기(基)
    27世
    수(銖)
    28世
    연(淵)
    29世
    병(秉)
    30世
    하(夏)
    31世
    중(重)
    교(敎)○
    32世
    모(謨)
    ○호(鎬)
    33世
    도(道)
    한(漢)○
    34世
    휴(休)
    ○식(植)
    35世
    진(晋)
    병(炳)○
    36世
    ○철(喆)
    37世
    종(鍾)○
    38世
    영(永)○
    39世
    상(相)○
    40世
    영(榮)○
    41世
    중(重)○
    42世
    ○진(鎭)
    43世
    태(泰)○
    44世
    ○근(根)
    45世
    동(烔)○
    46世
    ○배(培)
    47世
    -
    48世
    -
    49世
    -
    50世
    -
    51世
    -
    52世
    -
    53世
    -
    54世
    -
    55世
    -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7世孫은 26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
    봉화(奉化)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의 옛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고사마현(古斯馬縣)이라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옥마현(玉馬縣)으로 바뀌었고, 내령군(奈靈郡: 榮州)의 영현(嶺縣)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봉화현(奉化縣)으로 개편되어 현재의 지명을 갖게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안동(安東) 속현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설치하여 독립하였는데, 이때 안동부 소속의 미량부곡(彌良部曲)·매토부곡(買土部曲)을 편입하였다.
    조선 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현이 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단종복위운동으로 순흥부가 혁파되어 문수산 이동지역을 나누어 받았다가 1683년(숙종 9) 순흥이 복구되면서 이양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 대에 오지인 이 고을 태백산 각화사 근처에 선원각과 실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설치되어 태백산 사고로 불리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安東府) 봉화군(奉化郡)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로 이속되었다. 1913년에 교통편의를 위해 군 청사를 춘양면(春陽面)으로부터 봉화면(奉化面)으로 옮겼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군내면과 북면이 봉성면으로 통합되었고, 1956년에 내성면이 봉화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8년 봉화면이 봉화읍(奉化邑)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봉화금씨는
    1985년에는 4,696가구 19,687명, 2000년에는 6,476가구 21,07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3,301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