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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정씨(東萊鄭氏)
유래
시조 : 정회문(鄭繪文)
동래정씨는 신라의 6부촌장 가운데 자산진부 촌장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시조는 신라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기록이 없는데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 때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 역시 그 이후의 혈연계보가 불확실해 정지원을 1세로 하고 안일호장을 지낸 그의 아들 정문도(鄭文道)를 2세로 한다. 현재의 부산 동래를 세거지로 삼은 까닭에 동래를 본관으로 쓰게 됐다. 인물
조선시대에 상신 17명, 대제학 2명, 호당(湖堂) 6명, 공신 4명, 판서 20여명과
문과 급제 1백98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그중에서도 14세손 정난종(鄭蘭宗)에 이르러 동래 정씨는 명문의 반석을 더욱 굳혔다. 성리학자인 그는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성종 14년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가로도 수완을 보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원각사비 글씨는 바로 그의 솜씨다. 그의 네아들 중 정광필(鄭光弼)은 중종때 영의정에 오르고 당시에 어진 정승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그의 손자 정유길은 대제학, 좌의정을 지냈으며 정유길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일제침략의 난세 속에서 5천년간 이어온 조선의 얼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그는 금세기 정씨가문에 또 하나의 산맥을 이룬다. 유학자이자 사학자인 그는 해방 이전에는 연희전문(연세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에서 국문학을 강의했고. 시대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국학 발굴에 힘썼다. 그는 1892년 서울토박이로 태어나 한때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을 왕래하며 상해에서 항일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해방후 초대 감찰 위원장을 지내며 저술활동에도 힘을써 <조선사연구>, <양명학연표> 등의 저술을 남겼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정사룡(鄭士龍) : 문과(文科) 중종11년(1516)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정유길(鄭惟吉, 1515 乙亥生) : 문과(文科) 중종33년(1538)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형익(鄭亨益, 1664 甲辰生) : 문과(文科) 숙종45년(1719)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광세(鄭光世) : 문과(文科) 성종10년(1479)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완(鄭浣, 1752 壬申生) : 문과(文科) 순조7년(1807)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언섭(鄭彦燮, 1686 丙寅生) : 문과(文科) 영조1년(1725)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대년(鄭大秊, 1503 癸亥生) : 문과(文科) 중종27년(1532)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동후(鄭東後, 1659 己亥生) : 문과(文科) 숙종31년(1705)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지화(鄭知和, 1613 癸丑生) : 문과(文科) 인조15년(1637)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기일(鄭基一, 1787 丁未生) : 문과(文科) 순조26년(1826)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등 모두 72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97명, 무과 30명, 생원진사시 483명, 역과 4명, 의과 1명, 음양과 3명, 율과 6명) 세거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소가 누워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고 있는 형세라 해서 와우망월산. 이 산의 이름을 따 우망(牛望)골이라 했던 것을 고종때에 음이 같은 글자를 따 근심을 잊고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우망골(憂忘)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 전체 170여가구 중 160가구가 모두 동래정씨로 27세손부터 34세손까지 8대 한 핏줄이 모여산다. 처음에는 경북 안동군 구담리에 살다 성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12세손 정균령(鄭龜齡)이 자손이 번창할 곳이 못된다 하여 약 2백40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또한 이 마을은 왜가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東萊)는 현재 부산(釜山)과 양산(梁山)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옛 행정구역으로 경상남도 남동단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소국을 이루어 장산국(萇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이었다 한다. 79년(신라 탈해왕 23)에 이 지역을 점령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설치하고, 757년(경덕왕 16)에 동래군(東萊郡)으로 고쳐 동평(東平)과 기장(機張)은 동래의 영현으로 삼았고, 동래는 양주(良州: 梁山)의 관할로 개편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울주(蔚州: 蔚山)의 속현이 되었다. 1397년(태조 6)에 동래진으로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했고, 1423년(세종 5)에 부산포를 개항하여 왜관을 설치했으며 첨절제사를 두었다가 후에 현으로 바꾸었다.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으로 왜관을 폐쇄하였다가 1547년(명종 2)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면서 동래를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이후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했으며, 1749년(영조 25)에 동래부에 독진이 설치되어 군사적으로 한층 강화되었다. 1876(고종 13)에 최초의 개항장이 부산포에 설치되었고, 1890년에는 동래감리서가 설치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경상남도 동래부가 되었다가 1903년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06년 다시 부로 승격되었다. 1950년 부터 3년간 임시 수도이기도 하였다가 1963년 직할시로 승격하였다. 1973년에는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폐합되었으며, 1994년 부산광역시로 개편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동래정씨는
1985년에는 98,423가구 414,785명, 2000년에는 137,524가구 442,363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474,506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