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정지상(鄭知常)
시조 정지상(鄭知常)은 고려 예종 9년 문과에 급제하고 1127년(인조 5) 좌정언(左正言)으로 척준경(拓俊京)을 탄핵하여 유배케 했으며, 1129년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윤언이(尹彦 )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의 음양비술(陰陽秘術)을 깊이 믿어 한때는 세 사람을 삼성(三聖)이라 칭했으며,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것과 북쪽의 금(金) 나라를 정벌하고 고려의 왕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하였다.
1130년 지제고(知制誥)로서 왕명을 받아 곽여(郭輿)를 위해 "산재기(山齊記)"를 지었으며, 그 후 기거랑(起居郞)이 되었다.
묘청의 난 때 김부식(金富軾)에 의해 살해 당했다.
역학(易學)과 시(詩), 서(書), 화(畵)에도 뛰어나고 노장철학(老莊哲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인물
정응린(鄭應麟)은 조선 중종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 지평(持平), 장령(掌令),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간(大司諫) 등을 거쳐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지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서경정씨는
1985년에는 65가구 307명, 2000년에는 104가구 265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7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