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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정씨(延日鄭氏, 영일, 오천)
유래
연일정씨는 시조를 다르게하는 3개의 파가 있다. 이 3파는 신라 6부시대의 지백호의 후손으로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족보 및 종친회를 각각 다르게 하고 있다.
신라 때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을 도시조로 하고 그 후손인 정습명(鄭襲明)을 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 고려 현종때 동비원부사를 지낸 정자피(鄭子皮)가 1세조인 양숙공파(良肅公派)가 있다. 정습명은 고려 의종때의 중신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지냈으며, 그의 선대에 정의경이 연일호장을 지냈고, 다시 연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연일(현 영일)로 하였다. 그러나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으로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연일로 통일해서 쓰고있다. 인물
연일정씨는 조선시대에 5명의 상신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감무공파] 조선시대 중엽 송강 정철(鄭澈)은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우리 고전문학의 쌍벽으로 불리는 가사의 최고봉이다. 그는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에서 서인의 영수로 동인세력과 끝까지 맞서 싸운 투사였고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홍명은 인조때 대제학을 지냈으며, 정철의 현손인 정호는 영조때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정호 손자 역시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증손 정이환은 참판과 제학을 지냈다. 그밖에 고려 공민왕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鄭思道)와 조선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정홍명(鄭弘溟), 영조 때 영의정 정호(鄭澔), 영조 때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등을 들 수 있다. [지주사공파] 충신, 효자, 의인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나면서부터 어깨에 북두칠성처럼 검은점 7개가 박혀있어 이웃사람들도 모두 큰인물이 될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9세때 집에서 부리는 여종이 군에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그자리서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찼다 이지러지지만 첩의 마음은 항시 변치 않습니다"라고 써주었다. 짧은 한시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한 소년의 재능에 글방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 56세로 일생을 마칠때까지 기우는 민생을 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그밖에 현종 때의 우의정을지낸 정유성(鄭維成)과 정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 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정도성(鄭道成, 1641 辛巳生) : 문과(文科) 현종11년(1670)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철(鄭澈, 1536 丙申生) : 문과(文科) 명종17년(1562)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종명(鄭宗溟, 1565 乙丑生) : 문과(文科) 선조25년(1592)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시대(鄭始大, 1615 乙卯生) : 문과(文科) 효종2년(1651)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승명(鄭承明, 1604 甲辰生) : 문과(文科) 인조24년(164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식(鄭○, 1664 甲辰生) : 문과(文科) 숙종25년(1699)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해관(鄭海觀, 1807 丁卯生) : 문과(文科) 고종27년(1890) 기로응제시 장원급제 정회(鄭淮) : 문과(文科) 성종7년(1476)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정원달(鄭遠達, 1735 乙卯生) : 문과(文科) 영조32년(1756) 정시3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유성(鄭維城, 1596 丙申生) : 문과(文科) 인조5년(1627) 정시2 을과(乙科) 등 모두 42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11명, 무과 34명, 생원진사시 277명, 의과 1명, 음양과 2명, 율과 1명) 세거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마을에서 1Km남짓한 문수산 기슭에 연일정씨의 정신적 지주인 포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고 후손들은 조상의 묘를 지키며 2백여년 산아래에서 살아온다. 마을의 40여가구가 정씨 한집안으로 출세한 사람은 없지만 인근에서는 양반동네로 알아준다. 항렬자
지주사공파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포항시 영일읍
연일(延日)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위치한 포항시 영일읍(迎日邑)의 옛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근오지현(斤烏支縣) 또는 오량지현(烏良支縣)이라 불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임정현(臨汀縣)으로 개칭하고, 의창군(義昌郡: 興海)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일현(迎日縣: 延日)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에 경주부(慶州府)에 내속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조선 초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가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세종대에 다시 병마첨절제사로 고쳤다가 후에 현감만을 파견하였다. 1732년(영조 8)에 통양포(通洋浦) 아래에 포항창(浦項倉)을 설치해 함경도 진휼(賑恤)의 바탕으로 삼게 함으로써 함경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동해안 해로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동래부 영일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연일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일군은 연일면 등 5개면으로 분면되어 흥해·장기·청하군과 함께 영일군으로 통폐합되었고, 1980년 연일면이 연일읍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영일군이 포항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일정씨는
1985년에는 57,504가구 237,219명, 2000년에는 67,418가구 216,510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84,290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