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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정씨(淸州鄭氏)
    유래
     시조 : 정극경(鄭克卿)
    시조는 정극경(鄭克卿)은 고려 의종(毅宗) 때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정극경의 6세손 정책이 고려 충숙왕 때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고,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선공사(判繕工事)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인물
    정극경의 손자 정의가 고려 고종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정해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도첨의 찬성사
    (都僉議贊成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정책의 아들 정오는 고려 공민왕 때 공신(功臣)에 올랐다.
    정탁(鄭擢)이 조선개국일등공신(朝鮮開國一等功臣)으로청성군(淸城君)에 봉해져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가문을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빛냈다.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이충(鄭以忠)의 아들인 대사헌(大司憲) 정탁(鄭琢)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선조 때 춘추관(春秋館)의 기주관(記注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우찬성(右贊成)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다. 천문 . 지리 . 상수(象數) . 병법(兵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1604년 (선조 37) 호종공신삼등(扈從功臣三等)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이 밖의 인물로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정곤수(鄭琨壽)와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된 정구(鄭逑)가 뛰어났고, 선조(宣祖) 때 이름난 학자(學者) 정사성(鄭士誠)은 태릉 참봉(泰陵參奉)을 거쳐 현감(縣監)을 지낸 후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정사신(鄭士信),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역임한 정장(鄭樟),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정옥(鄭玉)은 병조참판(兵曹參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한 정내성(鄭來成)과 함께 청주정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정즙(鄭楫) : 문과(文科) 세종5년(1423) 식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정곤수(鄭崑壽, 1538 戊戌生) : 문과(文科) 선조9년(1576)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정훈석(鄭勛錫, 1839 己亥生) : 문과(文科) 철종9년(1858) 식년시 병과(丙科)
     정사신(鄭士信, 1558 戊午生) : 문과(文科) 선조15년(1582) 식년시 을과(乙科)
     정신(鄭藎, 1763 癸未生) : 문과(文科) 순조16년(1816) 식년시 을과(乙科)
     정영통(鄭永通) : 문과(文科) 세조5년(1459) 식년시 정과(丁科)
     정설(鄭○) : 문과(文科) 세종16년(1434) 알성시 을과(乙科)
     정재교(鄭在敎, 1852 壬子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식년시 병과(丙科)
     정탁(鄭琢, 1526 丙戌生) : 문과(文科) 명종13년(1558) 식년시 병과(丙科)
     정창휴(鄭昌休, 1808 戊辰生) : 문과(文科) 헌종12년(1846) 식년시 병과(丙科)
    등 모두 5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8명, 무과 4명, 생원진사시 33명, 의과 1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
    청주(淸州)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청소재지이다.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시대에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685년(신라 문무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淸州)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성종 14)에는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청주는 주(州)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였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도의 군사적인 중심지도 겸하였다. 그러나 역모사건 등으로 1656~1667년, 1681~1689년, 1804~1813년, 1826~1834년, 1862~18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청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비로소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청주면(淸州面)이라 개칭하였고, 1931년에는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읍으로, 1946년에는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로 개칭하였고 1983년 전국 행정구역 조정으로 청주시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95년 동부·서부 출장소가 동부는 상당구(上黨區)로, 서부는 흥덕구(興德區)로 승격하여 현재 상당구·흥덕구 2개 구가 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청주정씨는
    1985년에는 8,802가구 36,308명, 2000년에는 12,271가구 39,256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46,419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