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정언겸(鄭彦謙)
시조 정언겸(鄭彦謙)은 신라의 6부촌장의 한 사람인 지백호(智伯虎)의 38세손이다.
그는 고려 때 병부상서, 문하시중을 역임 하였고 1126년(고려 인종 4년) 탁준경(拓俊京)의 난 때 모평(牟平 : 함평의 옛 이름)으로 이사하여 후손들이 살면서 본관을 함평으로 하였다.
인물
함평정씨은 주로 고려시대에 관직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평장사를 지낸 정형(鄭炯)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에 오른 후 영풍부원군(永豊府院君)에 봉해진 정현수(鄭賢守), 예부상서 정신양(鄭臣良), 그리고 문하시중을 역임, 함평군에 봉해진 정함(鄭緘), 대제학 정을용(鄭乙龍) 등과 대제학의 관직에 오른 정안의(鄭安義)와 호조전서(戶曺典書) 정지유(鄭知遊), 140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선공감판관(繕工監判官)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른 정구명 등의 인물들이 있었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정세교(鄭世僑, 1659 己亥生) : 무과(武科) 숙종10년(1684) 식년시 병과(丙科)
정인(鄭璘, 1654 甲午生) : 무과(武科) 숙종4년(1678) 증광시 병과(丙科)
정회병(鄭會柄, 1860 庚申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22년(1885) 식년시 삼등(三等)
정문철(鄭文哲, 1684 甲子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36년(1710) 증광시 일등(一等)
정시달(鄭時達, 1782 壬寅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순조28년(1828) 식년시 삼등(三等)
정회인(鄭會寅, 1775 乙未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순조9년(1809) 증광시 삼등(三等)
정기징(鄭麒徵, 1699 己卯生) : 역과(譯科) 숙종40년(1714) 식년시 ()
정중화(鄭重華, 1868 戊辰生) : 역과(譯科) 고종28년(1891) 증광시 ()
정수침(鄭守鍼, 1691 辛未生) : 역과(譯科) 영조5년(1729) 식년시 ()
정수성(鄭守成, 1675 乙卯生) : 의과(醫科) 숙종25년(1699) 증광시
등 모두 25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무과 2명, 생원진사시 4명, 역과 3명, 의과 15명, 율과 1명)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함평
함평(咸平)은 전라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함풍(咸豊)과 모평(牟平) 두개 현이 합쳐진 지명이다. 선사시대에는 진국,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백제 때 굴내현(屈乃縣: 또는 屈奈縣)·다지현(多只縣)에 속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굴내현은 함풍현(咸豊縣)으로, 다지현은 다기현(多岐縣)으로 개칭되어 무안군에 이속되었다. 고려 태조 때 다기현을 모평현(牟平縣)으로 바꾸었고, 1018년(현종 9)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다. 1409년(태종 9) 모평현(牟平縣)과 합하여 함평현으로 개편하였다. 기성(箕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함평군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 함평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10개 면으로 줄었으며, 1932년 식지면과 평릉면을 합병하여 나산면으로 신설, 9개 면이 되었다. 1963년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함평정씨는
1985년에는 1,462가구 6,425명, 2000년에는 1,767가구 5,78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6,338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