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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조씨(金堤趙氏)
유래
시조 : 조연벽(趙連璧)
시조는 고려 고종 때의 무인 조연벽(趙連璧)이다. 김제읍 용두동(지금의 옥산동)에서 태어난 조연벽은 무예가 뛰어나 장수의 재목으로 꼽혔다고한다. 군인으로 벼슬길에 나선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1231년(고려 고종 18년) 몽고의 살리타이가 참략했을 때 대장군으로 임명된 그는 부장(副將) 김윤후(金允侯)와 함께 처인성(處仁城 : 현 경기도 용인)에서 몽고군을 소탕하고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무적 몽고군에 패전의 치욕을 안기면서 고려 무사의 기개를 만천하에 떨쳤다. 이 공으로 조연벽은 상장군이 되고 벽성군(碧城君)에 봉해졋다. 그가 태어난 김제시 옥산동 벽골제(碧骨堤) 연못에 얽힌 유명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연벽은 젊어서 무예가 뛰어나 장수의 재목으로 꼽혀왔는데, 어느 날 꿈에 나타난 벽골제 수호신인 흰 용의 부탁을 받고 벽골제를 빼앗으로 온 검은 용을 활로 쏘아 쫓아 주었다. 이때 검은 용이 떨어뜨리고 간 비늘을 나라에 진상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고, 연벽의 도움으로 벽골제 연못을 지키게된 흰 용이 그날밤 꿈에 다시 나타나 "장군의 도움으로 영원히 벽골제에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보답으로 자손들의 융성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노라"고 보은의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들 3형제가 모두 뛰어나 가문의 번영을 이어왔다. 벽성은 그가 태어난 김제의 옛이름으로 후손들이 김제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인물
시조 조연벽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가 현달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맏아들 조기(趙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려의 무인이 되어 잇단 몽고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대호군에까지 올랐고, 둘째 조서(趙瑞)는 문인이 되어 국자감진사에 뽑혔고, 세째 조간(趙簡)은 시문에 천재적 재질을 보여 벼슬이 문하시중과 우의정에 까지 이르렀다. 조선에서는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의(趙義), 그의 아들 호조판서에 오른 조숭지(趙崇智), 병조판서이며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마천군에 봉작을 받은 조숭지의 아들 조원윤(趙元倫) 등이 두드러진다. 또한 인조조 李괄의 난 때 대공을 세워 공신록에 책록된 조시준(趙時俊), 호조참의를 역임한 조덕술(趙德述)도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조선 문종 때 평안감사를 지낸 조수양(趙遂良)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단종을 내쫓자 벼슬을 버리고 영월까지 단종을 따라가 극진히 보살피다가 단종이 죽자 목숨을 끊은 절신이다. 옛임금을 쫓아 두 임금을 섬기지않는 절개를 지켰기에 오늘까지 영월 단종의 제사에는 그를 웃자리에 모시고 266명 순절신하들의 제사도 함께 지내오고있다. 인조 때 3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조필달(趙必達)은 무략이 출중한데다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일생동안 72가지 벼슬을 지내며 뛰어나 목민관으로 꼽혔고, 효종, 숙조 때에는 북진계획을 추진한 진취적인 인물이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조여기(趙汝器, 1652 壬辰生) : 무과(武科) 숙종4년(1678) 증광시 병과(丙科)
조계방(趙繼方, 1574 甲戌生) : 무과(武科) 광해군7년(1615) 식년시 병과(丙科) 조숙(趙○, 1628 戊辰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을과(乙科) 조안효(趙安孝, 1626 丙寅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조상로(趙相老, 1663 癸卯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28년(1702) 식년시 조중립(趙中立, 1543 癸卯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명종19년(1564) 식년시 이등(二等) 조기전(趙器全, 1657 丁酉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31년(1705) 증광시 이등(二等) 조수곤(趙壽崑, 1534 甲午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선조1년(1568) 증광시 삼등(三等) 조홍진(趙弘震, 1690 庚午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41년(1715) 식년시 삼등(三等) 조기전(趙器全, 1657 丁酉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숙종31년(1705) 증광시 삼등(三等) 등 모두 23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무과 4명, 생원진사시 19명) 세거지
전북 김제군 월촌면 복죽리.
김제조씨가 이곳에 뿌리를 내린것은 조선초,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의가 세종때 28살의 젊은 나이로 죽자 부인 강릉김씨는 5남매를 이끌고 오빠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터를 잡아준 김제로 옮겨 자식들을 모두 훌륭히 키워냈다. 이 마을에서 인근으로 옮겨 퍼진 자손이 1천여 가구를 헤아리며 복죽 마을도 70여 가구의 조씨들이 옛 가풍을 지킨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
김제(金堤)는 전라북도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한시대에 벽비리국(碧卑離國)이 있던 곳이다. 백제 인덕왕 때 벽골군(碧骨郡: 벼의 고을)으로 불리우다가 백제 멸망 후 당(唐)이 벽성(碧城)으로 고쳐 고사주(古四州: 高阜)의 영현을 삼았다.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평고현을 고쳐 김제군으로 개칭되었다. 1143년(고려 인종 21)에 전주목(全州牧)의 김제현이 되었다가 1171년(명종 1)에 금구현(金溝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466년(세조 12)에 김제군으로 승격되었다. 1628년(인조 6)에 만경현(萬頃縣)이 김제군에 병합되었고 1759년(영조 35) 만경군과 금구군이 김제군에 병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만경군과 금구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다시 만경군과 금구군을 병합하여 17개 면이 되었으며, 1931년 김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김제군의 김제읍과 일부면이 시로 승격 되었다가 1995년 김제군이 김제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김제조씨는
1985년에는 5,923가구 26,465명, 2000년에는 4,501가구 14,509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9,249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