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를 찾아서 ... |
![]() |
|
www.rootsinfo.co.kr |
성씨의 종류와 유래
성씨의 역사
족보 이야기
친인척 호칭법
국가 연대표
역대왕 연대표
성씨별 인구순위
본관별 인구순위
고사성어
![]() ![]() ![]() |
![]() 임천조씨(林川趙氏)
유래
시조 : 조천혁(趙天赫)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송나라 태조 조광유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 년에 위왕(魏王)이 화를 당하므로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화를 피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천혁(天赫)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천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과 함께 글란군(契丹軍)을 대파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가림백(嘉林伯 : 가림은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지고 문하시중평장사에 올랐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임천으로 하고 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장엄면 상황리에 있고, 매년 10월 10과 13일에 향사한다. 인물
조선시대에 감찰을 지낸 조찬(趙瓚)을 비롯하여 사성(司成)을 지낸 조원경(趙元卿), 시조의 10대손으로 보덕(輔德)을 지낸 조지서(趙之瑞), 군자감정을 지낸 조익(趙翊), 도사(都事)의 조응공(趙應恭) 승지의 조원(趙瑗) 등 여러 관직자를 배출하면서 가문의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또, 3대가 모두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친 조원(趙瑗), 조희일(趙希逸), 조석형(趙錫馨)이 있다. 조원은 선조 때 정언(正言)이 되어 당쟁의 폐해를 상소하였으며, 뒤에는 승지에 이르렀고 "독서강의(讀書講疑)" 등의 저서가 있다. 조희일은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을 거쳐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화와 시문에 능하여 "죽음집(竹陰集)" 등을 남겼다. 조석형은 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일체의 벼슬을 거부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당시(唐詩)에 정통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조희철(趙希哲)은 도사(都事)를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 그의 형 조희정(趙希正)과 함께 순절하자 조정에서 이를 표창하고 삼강록에 책록케 하였으며 쌍정여문(雙旌閭門)을 세우게 하였다. 조희진(趙希進)은 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조원기(趙遠期)는 166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세환(趙世煥)은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1637년 삼전도(三田渡)의 굴욕과 1644년 명제(明帝)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농사에 종사했다. 1657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통정대부에 올라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사재로 빈민을 구제하고 송상현의 사당을 수축하는등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 부터 말과 금품을 하사받고 전라도 관찰사, 승지 등을 역임했다. 영조 때의 조명정(趙明鼎)은 1740년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고 조정만(趙正萬)은 형조판서를 지냈는데 경사백가에 정통했으며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 밖에, 한문소설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의 저자로 알려진 조성기(趙聖期), 흥선대원군의 사위로서 공조와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일본정부가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거절한 조경호(趙慶鎬) , 의정(議政)을 지낸 조병호(趙秉鎬) 등이 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조덕성(趙德成, 1723 癸卯生) : 문과(文科) 영조39년(1763)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조덕성(趙德成) : 문과(文科) 영조50년(1774) 등준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조지서(趙之瑞) : 문과(文科) 성종10년(1479)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조형기(趙亨期, 1641 辛巳生) : 문과(文科) 숙종6년(1680)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조한익(趙漢益, 1841 辛丑生) : 문과(文科) 고종3년(1866) 별시 병과(丙科) 조명리(趙明履, 1697 丁丑生) : 문과(文科) 영조7년(1731) 정시 을과(乙科) 조원(趙瑗, 1544 甲辰生) : 문과(文科) 선조5년(1572) 별시2 병과(丙科) 조희진(趙希進, 1579 己卯生) : 문과(文科) 광해군8년(1616) 별시 병과(丙科) 조원기(趙遠期, 1630 庚午生) : 문과(文科) 현종1년(1660) 증광시 병과(丙科) 조희철(趙希哲, 1529 己丑生) : 문과(文科) 선조22년(1589) 증광시 병과(丙科) 등 모두 14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42명, 무과 2명, 생원진사시 96명, 율과 6명) 세거지
-충남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
-충남 예산군 삽교읍 수촌리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충남 논산군 양촌면 석서리, -충남 대덕군 기성면 -충남 서산군 음암면 탑곡리 -충북 중원군 이류면 문조리 -충북 중원군 동량면 대전리 -충북 괴산군 소수면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 -전북 익산군 함라면 함열리 -전북 임실군 관촌면 족보발간
-기해보 : 1959년
-무진보 : 1988년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
임천(林川)은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 가림군(加林郡)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가림(嘉林)으로 고쳤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임주(林州)로 승격하였다가, 1018년(현종 9) 가림현(嘉林縣)으로 강등되었는데 1315년(충숙왕 2) 다시 주(州)로 승격시켰다. 1394년(태조 3) 부(府)로 삼았다가 1401년(태종 1) 임주로 복귀시켰으며, 1403년(태종 3) 다시 부(府)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강등시켰다. 1413년(태종 13) 임천(林川)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삼았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가 되었고, 1896년 충청남도에 소속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부여군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임천조씨는
1985년에는 2,511가구 10,448명, 2000년에는 3,476가구 11,040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4,258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