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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조씨(稷山趙氏)
유래
시조 : 조성(趙成)
시조 조성(趙成)은 백제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직산조씨갑자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조성(趙成)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11대 황제, 재위기간 : 기원전 32 - 7) 때 주몽(朱蒙)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도와 위례성(慰禮城)에서 백제(百濟)를 건국하고, 한산(漢山)으로 천도(遷都)하여 마한(馬韓)을 멸망시킨 후 백제창업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훈공을 세워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다시 예성부원군(醴城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가 하남백(河南白)에 이봉(移封)되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조준연(趙俊連)과 손자 조입충(趙立沖)이 함께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을 역임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시조의 손자 조입충(趙立沖)으로부터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후손들은 고려 말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합문지후사(閤門祗侯使)에 올랐던 조원우(趙元祐)와 병부 낭중(兵部郞中) 조원경(趙元慶),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조복원(趙復元), 태자 첨사(太子詹事) 조영원(趙永元),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한 조응원(趙應元) 등 다섯 계통으로 갈라져서 각각 중시조로 받들고 대를 이어왔다. 인물
합문지후사 조원우(趙元佑)의 손자 조방림(趙邦霖)이 조선 세조가 등하는데 공을 세워 좌익공신(左翼功臣)에 책록되었고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조광보(趙光甫))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여 부자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地)에 추증되었던 조경(趙瓊,참판 조광보의 현손)의 맏아들 조응형(趙應亨)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역임했으며, 전의 현감(全義縣監)을 지낸 조탁(趙擢, 사정 조광원의 현손)의 아들 조서동(趙瑞東)은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한편 임진왜란 때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있었던 조영규(趙英圭)는 양산성(梁山城) 수비에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고 장성의 모암서원(慕庵書院)과 양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던 조영(趙英)은 숙종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던 조수(趙洙)와 함께 무맥(武脈)을 이었다. 인조 때의 명신 김원행(金元行)의 문인(門人)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났던 조유선(趙有善)은 유학(儒學)에 정통하여 「고정유사(考亭遺事)」와 「사우연원(師友淵源)」을 편찬했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진산 군수(珍山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그외 숙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복장(司僕將)을 지내고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올랐던 조태상(趙台相)은 군수를 역임한 조정휴(趙鼎休)와 함께 직산조씨를 더욱 빛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조응형(趙應亨, 1525 乙酉生) : 문과(文科) 명종19년(1564) 식년시 병과(丙科)
조유신(趙有臣, 1714 甲午生) : 문과(文科) 영조20년(1744) 식년시 병과(丙科) 조색(趙穡, 1564 甲子生) : 문과(文科) 선조36년(1603) 식년시 을과(乙科) 조성달(趙聖達, 1597 丁酉生) : 문과(文科) 인조22년(1644) 별시 병과(丙科) 조욱(趙稶, 1558 戊午生) : 문과(文科) 선조21년(1588) 식년시 병과(丙科) 조기남(趙己男, 1581 辛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조상룡(趙尙龍, 1635 乙亥生) : 무과(武科) 현종10년(1669) 정시 병과(丙科) 조예남(趙禮男, 1604 甲辰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조응립(趙應立, 1577 丁丑生) : 무과(武科) 광해군5년(1613) 증광시 을과(乙科) 조창흥(趙昌興, 1649 己丑生) : 무과(武科) 숙종1년(1675) 증광시 갑과(甲科) 등 모두 2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5명, 무과 10명, 생원진사시 12명)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
직산(稷山)은 충청남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었다. 고구려 때 사산현(蛇山縣)으로 고쳤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백성군(白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직산(稷山)으로 고쳤으며, 1018년(현종 9) 천안부(天安府)에 예속시켰다가 후에 다시 설치하였다. 1413년(태종 13) 현감(縣監)을 두었고, 1504년(연산군 10) 경기도(京畿道)로 옮겼으나 중종 때 복구하여 충청도(忠淸道)에 속하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직산군이 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천안군(天安郡)에 병합되어 직산면이 되었다. 1995년 천안시 직산읍이 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직산조씨는
1985년에는 861가구 3,498명, 2000년에는 1,072가구 3,387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4,360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