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좌형소(左亨蘇)
시조 좌형소(左亨蘇)는 원나라 천관시랑(天官侍郞)으로 고려 말기에 탐라(耽羅 : 제주도) 목마장(牧馬場)의 감목관(監牧官)으로 부임하여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따라서 한국의 좌씨 발상지는 제주도라 할 수 있는데 좌형소가 죽음에 이르러 "사람은 그 뿌리를 잊어서는 안된다."하며 대대로 살아오던 중국 산동성 청주(靑州)를 본관으로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으나, 1922년 조선 호적령에 따라 청주라는 지명이 한국에 없어 음이 이같은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물
고려 때의 명의 좌자이(左自以)는 고려 왕후의 중병을 완쾌시켜 이에 탄복한 왕으로부터 그가 살던 한동리(漢東里)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았는데, 지금도 그 곳은 좌가장(左哥場)으로 불리운다.
세거지
북제주군 애월읍 금성리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
청주(淸州)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청소재지이다.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시대에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685년(신라 문무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淸州)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성종 14)에는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청주는 주(州)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였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도의 군사적인 중심지도 겸하였다. 그러나 역모사건 등으로 1656~1667년, 1681~1689년, 1804~1813년, 1826~1834년, 1862~18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청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비로소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청주면(淸州面)이라 개칭하였고, 1931년에는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읍으로, 1946년에는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로 개칭하였고 1983년 전국 행정구역 조정으로 청주시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95년 동부·서부 출장소가 동부는 상당구(上黨區)로, 서부는 흥덕구(興德區)로 승격하여 현재 상당구·흥덕구 2개 구가 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청주좌씨는
1985년에는 455가구 1,791명, 2000년에는 838가구 2,691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3,280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