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를 찾아서 ... |
![]() |
|
www.rootsinfo.co.kr |
성씨의 종류와 유래
성씨의 역사
족보 이야기
친인척 호칭법
국가 연대표
역대왕 연대표
성씨별 인구순위
본관별 인구순위
고사성어
![]() ![]() ![]() |
![]() 상주주씨(尙州周氏)
유래
시조 : 주이(周頤)
시조 주이(周頤)는 786년(신라 원성왕 2년) 당나라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귀화했다. 주이는 신라에서 병부령, 상주총관 등을 지냈고 이를 인연으로 후손들이 상주에 터를 잡아 상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주씨의 원조는 고대 중국( BC1134) 주나라의 무왕이라 한다. 주나라는 37대 난왕때 진나라에 망했는데 그후 후손들이 나라이름인 주자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물
주세봉(周世封)은 고려 광종 때 지주사에 주연(周演)은 현종때 병부시랑에 주겸(周謙)은 예부랑중에 각각 이르러 고려시대에 이름을 남겼다.
이밖에 공민왕때 예부상서에 이른 주세후(周世侯)와 같은시대 이부상서를 지낸 주경(周璟) 부자는 고려의 절신이었다. 이들은 이성계의 득세로 고려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할 때 벼슬을 버리고 경남 산청의 배양촌에 은거했다. 주유(周瑜)는 고려 말에 진사(進士)를 지내다가 1392년(태조 1)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길재(吉再), 김자수(金自粹) 등과 함께 벼슬을 마다하고 내천 초계현에 은거하여 세칭 <포번삼절사>로 불리웠다. 김해로 낙향한 문하시랑을 지낸 주관(周琯) 등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선비들이다. 조선시대의 주세붕(周世鵬)은 1522년(중종 17년) 생원(生員)으로 별시문과에 급제한 세붕은 승문원 정자로 사가독서를 한 후 명종 때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한국 최초의 사설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여 도학(道學)의 학풍을 수립한 교육자로서 일생동안 대사성(大司成)을 3번 역임한 청백리이다. "태평곡(太平曲)" "육현가(六賢歌)" 등 4편의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8편의 단가(短歌)를 남기는 등 시가(詩歌)에 능했다. 그의 아들 주박(周博)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며 우리말과 글을 갈고 다듬어 이를 널리 펴는데 일생을 바친 선구자 주시경(周時經)은 1910년 최초의 국어사전 "말모이"의 편찬에 착수, 흩어진 우리말을 찾는 작업을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못하고 36살의 젊은나이에 급환으로 숨졌다. 그러나 "말모이"의 초고는 해방후 한글학회가 "우리말 큰사전"을 완성하는 데 초석이 된다. 이 밖에 경종 때의 의학자로 "의문보감(醫門寶鑑)"을 저술한 주명신(周命新)이 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주중문(周仲文) : 문과(文科) 세조6년(1460) 별시 을과(乙科)
주윤창(周允昌) : 문과(文科) 성종11년(1480) 친시 을과(乙科) 주세붕(周世鵬, 1495 乙卯生) : 문과(文科) 중종17년(1522) 별시 을과(乙科) 주봉한(周鳳翰, 1860 庚申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식년시 을과(乙科) 주박(周博, 1524 甲申生) : 문과(文科) 선조1년(1567) 증광시 병과(丙科) 주이(周怡) : 문과(文科) 명종1년(1546) 증광시 병과(丙科) 주득립(周得立, 1588 戊子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주지윤(周祉胤, 1601 辛丑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주정신(周鼎新, 1618 戊午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주박(周博, 1524 甲申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명종13년(1558) 식년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등 모두 18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6명, 무과 3명, 생원진사시 8명, 역과 1명) 세거지
경남 내천군 율곡면 문림리.
마을 대부분이 주씨이다. 처음 이고을에 들어온 조상은 고려말의 절신 주유(周瑜)이다. 고려가 망하자 이곳 대암산 기슭에 은거하며 고려의 재기를 빌며 후학들을 길러낸 인물이었다. 수백년 연륜의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 마을뒤편 산언덕에 지붕을 드리운 호연정(浩然亭)은 주유를 기리는 사당이다. 명종때 예안현감을 지낸 그의 후손 주이(周怡)가 세운것으로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서 후손들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기상을 가르쳤다고한다. 호연정 대청을 오르면 바로 눈앞에 황강의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
상주(尙州)는 경상북도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상산(商山)이라고도 한다. 삼한시대에 진한(辰韓)의 영토였으나 185년(신라 벌휴왕 2,고구려 고국천왕 7) 사벌국(沙伐國: 혹은 沙佛國)이라는 소국으로 유지해 오다가 신라 첨해왕 때 정벌되어 524년(신라 법흥왕 11)에 상주(上州)로 고쳐 군주(君主)를 두었다. 진흥왕이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치고 신문왕 때 사벌주(沙伐州)로 개칭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상주(尙州)로 개칭하였으며 776년(혜공왕 12)에 다시 사벌주로 환원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상주라 이름하였다가 곧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바뀌었고 성종 때 귀덕군(歸德郡)이라 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8년(현종 9) 전국에 8곳의 목(牧)을 설치할 때 상주목이 되었다. 1012년(현종 3) 다시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쳐서 8목의 하나로 정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상주목으로 개편되었다. 1408년(태종 8)에 경상감영이 상주로 옮겨왔다가, 1596년(선조 29)에 관찰사영은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한 대구로 옮겨갔다. 상락(上洛)·상산(商山)·타아(陀阿)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상주목이 상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 경상북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함창군이 편입되었고, 1931년에 상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에는 상주읍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고, 1995년 상주군이 상주시에 통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상주주씨는
1985년에는 5,165가구 21,715명, 2000년에는 5,745가구 18,384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2,909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