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신안주씨는 중국 송나라 신안현 사람인 주잠(朱潛)이 고려 고종 때 동래하여 나주(羅州)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그를 동래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주자(朱子)의 증손자인 주잠은 송나라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아들 주여경(朱餘慶)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망명해 와서 금성(錦城)에 자리잡고 살았다고「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원나라에서 송나라의 유민을 압송하려 했을 때 이름을 주적덕(朱積德)이라 고치고 능성 고정리(考亭里)에 숨어지내다가 여러 곳으로 이주하여 지명에 따라 따로 본관을 사용해 온 관계로 신안(新安), 나주(羅州), 능성(綾城) 등 45개 파로 갈리었다.
1902년(고종 39) 의정부 찬정 주석면(朱錫冕)의 상소로 선조의 본래 고향인 신안(新安)을 본관으로 복관하게 되었다.
인물
주잠의 아들 주여경(朱餘慶)이 고려 고종 때 은사과(恩賜科)에 올랐고, 주여경의 아들 주열(朱悅)은 원종 때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 충청 경상 전라도의 안찰사(按察使)로 나가 크게 치적을 올렸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생활이 검소하여 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뒤에 한림학사(翰林學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지냈고 충렬왕 때는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에 이르러 능성군에 봉해졌다.
주열의 아들 주인장(朱印長), 주인원(朱印遠), 주인환(朱印還) 3형제는 널리 이름을 떨쳐 신안주씨 가문을 중흥시켰는데, 맏아들 주인장(朱印臟)은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고, 둘째 주인원(朱印遠)은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였으며, 셋째 주인환(朱印還)은 첨의부사(僉議府使)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약관도 못되어서 향시에 합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주택정(朱宅正)은 우암 송시열이 덕원에 유배되어 오자 그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고 1679년(숙종 5) 식년문과에 올라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이성현감(利城懸監)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화를 입자 그의 문인이라 하여 삭직되었다가 노론이 다시 집권하면서 복직되어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주몽룡(朱夢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금수(金山郡守)로 의병장 강덕룡, 정기룡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 싸움에서 용전, 왜군을 격파하여 3룡으로 불렀다. 그외 중종 때 전적을 지낸 주양우(朱良佑)와 선조 때 군수(郡守)를 역임한 주덕원(朱德元)의 부자가 유명했고, 주정은 숙종 때 개성 교수(開城敎授)를 역임하여 경원부사 주표(朱杓)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말에 와서는 고종 때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을 지낸 주석면(朱錫冕)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주인섭(朱寅燮)이 이름났으며, 주진수(朱鎭洙)는 신민회 강원 대표로서 만주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 모집에 공헌하여 대한청년단 모검부장을 지낸 주석환(朱錫煥)과 함께 신안주씨 가문을 충과 의의 가문으로 더욱 유명하게 했다.
주요 인물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중국 신안
신안은 중국 중앙부, 양자강 하류 및 회하 유역의 안휘성 휘주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신안주씨는
1985년에는 34,573가구 142,612명, 2000년에는 47,551가구 151,227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48,207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