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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김씨(江陵金氏)
    유래
     시조 : 김주원(金周元)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6세손이다.
    원래 김주원은 각간(角干)으로 시중(侍中; 신라 최고 관직) 겸 병부령(兵部令; 군사 총책임자)를 지냈다.

    785년(신라 선덕왕 6년) 선덕왕이 후손이 없이 죽자 군신 회의 끝에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으나 경주의 알천 북쪽 20리 밖에 살던 김주원이 갑자기 큰비가 내려 알천을 건널 수 없어 입궐을 못하였다. 이에 군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다" 하여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 원성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가 개인다음 그가 대궐에 들어가자 원성왕은 그에게 즉위 할 것을 권유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에 내려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하고 명주(溟州: 강릉), 익령(翼嶺: 양양), 근을어(斤乙於: 평해), 삼척, 울진 등을 다스리게 하고 그 땅을 식읍으로 하사 하였다.
    김주원은 명주성을 쌓고 영동일대를 통치했으며 이에 따라 후손 들이 강릉을 본관으로 하였다. (참고 : 삼국유사, 삼국사기)

    - 묘는 강원도 명주군 성산면 보광리 삼왕릉에 있다.

    참고로 강릉김씨에는 다른 계파가 있는데 경순왕의 여섯째 아들 김건(金鍵)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이다. 이 두파를 구분하기 위해 김건을 시조로하는 강릉김씨를 후 강릉김씨라 구분하여 부른다.
    인물
    김주원은 김종기(金宗基), 김헌창(金憲昌), 김신(金身)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김헌창은 헌덕왕 때 공주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전라, 충청도 지방을 점령했으나 실패로 끝나 자결했다.
    첫째 아들 김종기의 손자 김양(金陽)은 838년(민애왕 1년)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죽게하고 왕위에오른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으로 추대하고 각간시중 겸 병부령을 지냈다.
    김순식(金順式)은 고려 건국초 명주(溟州)장군으로 끝까지 항거하다 왕건에게 설득을 받고 왕건에게 협력하여 후백제 정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대광(大匡)에 오르고 왕씨 성을 하사 받았으나 조선개국 후 왕씨가 탄압을 받자 원래 성인 김씨로 환원하였다.
    9세손 김상기(金上琦)가 고려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인존(金仁存)은 문하평장사 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고려 인종 때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대표적이다.
    1435년(세종 17년) 성균관 부근에서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신재(神才)로 불리워진 그는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黃雲片片四方分)"

    그가 5세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이 소식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총애했다고 하며, 40여 년간 대사성을 지낸 김반(金泮: 후손을 강서김씨라 함)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상(尹詳)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21세 때인 1455년(단종 3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특히 그는 세조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며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으며, 서기 1463년(세조 9년) 책을 구하러 한양(漢陽)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2남)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1468년(세조 13년)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서기 1481년(성종 12년)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2년 뒤 다시 한양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애를 마쳤다.
    사예(司藝) 김충정(金忠貞)의 아들 김첨경(김添慶)은 1549년(명종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어사(御史), 부수찬(副修撰), 지평(持平) 등을 거쳐 1561년(명종 1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史)로 나갔다가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외 감찰(監察) 김종윤(金宗胤)의 아들 김충렬(金忠烈)이 중종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성부 판관, 경기도사를 거쳐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館: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김국평(金國坪)의 아들 김행(金行)은 선조 때 무장현감(茂長縣監)이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의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예조 판서 김첨경(添慶)의 현손(玄孫)인 김시혁은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김시환(김始煥)과 김시형(金始炯)도 예조(禮曹) 및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우참찬(右參贊),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계락(啓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년(광해군 1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한 김기종(金起宗)은 김철명(金哲命)의 아들로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 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무훈을 세워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대사간(大司諫),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 예조, 호조(吏禮戶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김상성(金尙星)과 영조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 조선 때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가서 봉조하(奉朝賀)가 된 김상익(尙翼), 예조(禮曹) 및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김상적(金尙迪)이 유명했다.
    김시현(金始炫)의 아들 김상중(金尙重)은 영조 때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 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김상집(金尙集)과 학자로 유명한 김홍운(金鴻運), 형조판서(刑曹判書) 김화진(金華鎭)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김상철은 1775년(영조 51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학덕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일찍이 우의정(右議政) 때 편집청을 두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충렬(金忠烈, 1503 癸亥生) : 문과(文科) 중종26년(1531)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기종(金起宗, 1585 乙酉生) : 문과(文科) 광해군10년(1618)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상구(金尙耉, 1704 甲申生) : 문과(文科) 영조10년(1734)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상성(金尙星, 1703 癸未生) : 문과(文科) 경종3년(1723)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팔원(金八元, 1524 甲申生) : 문과(文科) 명종10년(1555) 식년시 을과(乙科)
     김광진(金光軫) : 문과(文科) 중종21년(1526) 별시 을과(乙科)
     김중형(金仲衡) : 문과(文科) 세조3년(1457) 별시 정과(丁科)
     김순명(金順命, 1561 辛酉生) : 문과(文科) 선조21년(1588) 알성시 을과(乙科)
     김일기(金一夔, 1653 癸巳生) : 문과(文科) 숙종3년(1677) 알성시 병과(丙科)
     김몽호(金夢虎, 1557 丁巳生) : 문과(文科) 광해군1년(1609) 증광시 병과(丙科)
    등 모두 32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97명, 무과 19명, 생원진사시 205명, 역과 1명, 의과 1명, 음양과 2명, 율과 1명)
  • ※ 과거급제자는 조선조방목 기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다.
  • 항렬자
    33世
    학(學)○
    34世
    병(秉)○
    35世
    연(演)○
    36世
    ○경(卿)
    37世
    진(振)○
    38世
    ○기(起)
    39世
    남(南)○
    40世
    ○래(來)
    41世
    동(東)○
    42世
    ○유(猷)
    43世
    성(成)○
    44世
    ○현(玄)
    45世
    만(萬)○
    46世
    ○구(九)
    47世
    명(命)○
    48世
    ○영(寧)
    49世
    무(茂)○
    50世
    ○기(紀)
    51世
    유(庾)○
    52世
    ○재(宰)
    53世
    성(聖)○
    54世
    ○규(揆)
    55世
    종(鐘)○
    56世
    ○수(洙)
    57世
    상(相)○
    58世
    ○용(容)
    59世
    재(在)○
    60世
    ○호(鎬)
    61世
    순(淳)○
    62世
    ○식(植)
    63世
    환(煥)○
    64世
    ○희(喜)
    65世
    -
    66世
    -
    67世
    -
    68世
    -
    69世
    -
    70世
    -
    71世
    -
    72世
    -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34世孫은 33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강원도 강릉
    강릉(江陵)은 기원전부터 성읍국가인 예맥족(濊貊族)의 예국(濊國)이 있던 지역으로 127년 이후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하였다.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불리었다.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639년(선덕여왕 8) 2월에는 북소경(北小京)을 두었고, 658년(무열왕 5) 말갈족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소경을 폐지하고 하서주(河西州)로 개편하여 도독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 명주(溟州)로 개편하여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를 두었고 9군 25현을 관할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두었다. 그 후 우계(羽谿)·연곡(連谷)의 두 현을 두었다가, 1260년(원종 1) 공신 김홍취의 고향이라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1789년(정조 12)에 강릉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강릉군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강릉읍·성덕면·경포면을 통폐합하여 강릉시로 승격하면서 명주군을 분리시켰다가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을 강릉시로 통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강릉김씨는
    1985년에는 35,816가구 150,577명, 2000년에는 52,050가구 165,963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79,593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