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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최씨(開城崔氏)
유래
시조 : 최우달(崔佑達)
시조 최우달(崔佑達)은 토산현(土山縣 : 현 평북 중화군) 사람으로 신라의 대상(大相)이었다. 그의 아들 최응(崔凝)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여러대에 걸쳐 개성에서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개성으로 하였다. 인물
- 최응(崔凝) : 최우달의 아들. 오경에 통하고 문장에 능했다. 궁예 밑에서 사령을 받아쓰는 등 신임을 얻었다. 신덕왕 4년 궁예가 왕건을 불러들여 모반했다는 누명을 씌우려 할 때 왕건이 화를 면하게 해준다. 왕건이 모반을 부인하자 일부러 뜰에 붓을 떨어뜨린 다음 이를 주우려고 뜰에 내려가‘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귀띔해주어 위기를 넘기게 한 것이다. 이때부터 왕건과 가까워져서 고려가 개국하고 왕건이 즉위하자 광평시랑 등을 역임하며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태조 15년 그가 35세로 죽으니 태조가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부로 증직했다.
- 최입(崔岦) :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외직을 역임한 뒤 1577년(선조 10)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일찍기 이이의 문하에서 글을 읽어 문장과 시에 능하여 여러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그의 글과 차천로의 시, 한호의 글씨를 송도삼절이라 일컬었다. - 최천보 : 조선에서 한성부윤을 역임했다 - 최명창(崔命昌) : 예조참판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 최유, 최철손 : 조선 때 지사를 역임하였다. - 최이 : 사과를 지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최명창(崔命昌, 1466 丙戌生) : 문과(文科) 연산군10년(1504) 식년시 을과(乙科)
최석영(崔錫瑛, 1856 丙辰生) : 문과(文科) 고종22년(1885) 식년시 병과(丙科) 최헌정(崔獻禎, 1551 辛亥生) : 무과(武科) 선조16년(1583) 별시 병과(丙科) 최학준(崔學峻, 1874 甲戌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28년(1891) 증광시 삼등(三等) * 모두 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2명, 무과 1명, 생원진사시 1명) 세거지
- 함북 학성군 학서면 업억동
- 함북 길주군 역사면 역흥동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개성특급시
개성(開城)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현재 개성직할시가 되었다. 본래 고려의 수도였으며, 그 이전까지 송악군(松嶽郡)·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었다. 고구려 때에는 부소갑(扶蘇岬)이라 했으며, 465년(백제 개로왕 11)에는 100년 동안 백제 영토였다. 555년(신라 진흥왕 16)에 신라가 점령한 이후 송악군(松嶽郡)으로 개칭되었고, 898년(효공왕 2)에 궁예가 잠시 태봉의 도읍으로 삼기도 하였다. 919년(고려 태조 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송악산(松嶽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풍군과 송악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5부를 설치하였다. 960년(광종 11)에는 개경(開京)으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개칭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1467년(세조 13)에 개성부로 경기도에 편입되어 개성부윤(開城府尹)이 부임해 오다가 1906년 개성군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가 되었고, 1954년 10월 개풍군과 판문군(板門郡)이 황해북도에 편입되었다. 1955년 개성시와 황해북도 개풍군·판문군이 통합되어 개성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61년 3월 황해북도 장풍군에 강원도 철원군 일부를 편입시키면서 개성직할시의 관할이 되었다. 2004년 1월 개성직할시를 황해북도 개성특급시(開城特級市)로 바꿨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개성최씨는
1985년에는 716가구 3,306명, 2000년에는 465가구 1,487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939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