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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주최씨(朗州崔氏)
유래
시조 : 최흔(崔昕)
시조 최흔(崔昕)의 선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는 낭주(영암)에 대대로 살아왔으며 신라 효공왕, 신덕왕 때에 원보(元輔)를 역임하고 가세를 번창시켜 후손들이 낭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최흔 이후의 계대가 확실치 않아 고려 말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최희소(崔希沼)를 중조로 하여 대를 잇고 있으며, 문중에 따르면 경주최씨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인물
최흔의 아들 최지몽(崔知夢)은 초명이 최총진(崔聰進)으로 907년(신라 효공왕 11) 영암군 동구림리(東鳩林里)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널리 통달했으며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하였다. 나이 18세 때 고려 태조 왕건이 그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吉兆)를 얻어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다스릴 것이다."하여 태조가 기뻐하며 그 이름을 지몽(知夢)이라 고쳐 주고 금의(錦衣)를 내려주고 공봉(供奉)의 관직에 임명하였다.태조(太祖) 때부터 60여 년 간 중신(重臣)으로 봉직(奉職)한 그가, 987년(성종 6) 3월에 사망하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증직함과 동시에 민휴(敏休)란 시호(諡號)를 주었으며, 후에 태사(太師)를 증직하여 경종(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최안우(崔安雨)는 문과에 급제하고 봉열대부(奉列大夫)와 검교군기시소감(檢校軍器侍小監)을 거쳐 재상(宰相)에 올랐다. 그는 평소에 성품이 강직하고 성리지학(性理之學)에 밝았으며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과 도의(道義)를 나누며 시를 주고 받았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영평(永平:현 전남 나주군 봉황면 만봉리) 도성산(道成山)으로 들어가 시냇가에 대나무를 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기리면서 호를 죽제(竹溪)라 칭하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았다. 최안우의 아들 최운(崔雲)은 조선에서 현감을 지냈으며, 최운의 아들 네 명이 모두 벼슬에 올랐는데 장남 최양(崔漾)이 지현(知縣)에, 차남 최창(崔漲)은 현령(縣令)에 올랐고 셋째 최상(崔湘)과 넷째 최영(崔渶)은 계공랑(啓功郞)과 찰방(察訪)을 각각 역임했다. 그 외 후손 최치호(崔致湖)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으며, 최산두(崔山斗)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많은 명사(名士)를 배출시켰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최병욱(崔秉煜, 1833 癸巳生) : 문과(文科) 고종20년(1883) 식년시 병과(丙科)
최창룡(崔昌龍, 1791 辛亥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순조31년(1831) 식년시 이등(二等) 최상헌(崔相憲, 1859 己未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19년(1882) 증광시 삼등(三等) 최창구(崔昌龜, 1794 甲寅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순조22년(1822) 식년시 삼등(三等) 최치정(崔致廷, 1868 戊辰生)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고종19년(1882) 증광시 삼등(三等) * 모두 5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1명, 생원진사시 4명)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영암
낭주(朗州)는 전라남도 영암(靈巖)의 옛 이름으로 삼한시대 마한의 영토였다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고 월내군(月奈郡)이라 불리었다. 758년(신라 경덕왕 17)에 영암군(靈巖郡)이 되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낭주군(朗州郡)이라 개칭하였고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낭주 안남도호부를 폐지하였고, 영암군(靈巖郡)으로 복칭되었다. 1914년(융희 8) 11개 면으로 분할된 이래 1979년 영암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삼호면이 2003년 읍으로 승격하여 2읍 9면으로 되어 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낭주최씨는
1985년에는 2,764가구 11,723명, 2000년에는 4,417가구 14,264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17,205명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낭주최씨는 6세손을 파조로 하여 6개로 분파되었는데,
최양(崔漾)의 후손이 봉직공파(奉直公派), 최창(崔漲)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최상(崔湘)의 후손이 녹사공파(錄事公派), 최영(崔渶)의 후손이 찰방공파(察訪公派), 최간(崔澗)의 후손이 함안파(咸安派)로 나뉘어 지고, 최양(崔洋)의 후손은 전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