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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김씨(廣州金氏)
유래
시조 : 김녹광(金祿光)
광주김씨는 경주김씨에서 분파한 의성김씨에서 직계 분파된 본관이다. 시조 김녹광(金祿光)은 신라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7세손이다. 그는 1217년(고려 고종 4년)에 부사(副使)를 거쳐 1231년(고려 고종 18년)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1236년(고려 고종 23년) 원나라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때 상장군으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시키는데 큰 공을 세워 광주군(廣州君)에 책봉되고 광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광주를 본관으로 하고있다. 인물
김녹광의 아들 김굉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내고, 김굉의 아들 김훤(호는 둔촌)은 당대의 명신으로 명성을 떨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다.
김훤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1269년(원종 10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서 원제(元帝)의 힘을 빌어 권신(權臣) 임연(林衍) 일당의 역모를 저지시켰고, 이듬해 금주(金州 : 지금의 김해) 방어사(防禦使)로 나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예부낭중(禮部郎中), 도호부사(都護府使) 등을 거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문하성에 속했던 정2품의 관직)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다. 김훤의 두 아들 중 맏아들 김남물(金南物)은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으며, 김개물(金開物)은 충숙왕 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시와 글씨, 그 림에 모두 능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한 김차문(金次文)과 경연관의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김차무(金次武) 형제, 상주목사(尙州牧使) 김경보(金敬寶)와 강릉부사(江陵府使) 김대근(金大根), 영의정에 추증된 김희증(金希曾)이 유명했다. 조선 시대에 가문을 크게 일으킨 인물은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태허(金太虛)를 들 수 있다. 그는 김희증(金希曾)의 아들로 태어나 1580년(선조 13년) 무과에 급제하고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있다가 밀양부사(密陽府使)에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군수(蔚山郡守)로서 역전의 무공을 세웠고, 난이 평정된 후 선무1등공신으로 도총관(都摠管), 호위대장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그의 아들 김수겸(金守謙)도 아버지를 따라 전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고 안동영장(安東營將), 중추부사(中樞府事) 등을 역임했다. 공조참의 김차문(金次文)의 증손자 김기(金琦)는 임진왜란 때 판관(判官)으로 의병을 일으켜 동래성(東萊城) 전투에서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추증되었다.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의 사촌인 김태을(金太乙)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임하고 돌아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김수인도 광해군의 패륜을 개탄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영남유학(嶺南儒學)의 중진으로 일컬어진 아버지 김태을의 학문을 이었다. 한말에 와서도 광주김씨는 김진성(金振聲), 김석창(金錫昌), 김상윤(金相潤)을 비롯한 많은 항일투사를 배출하여 충절의 전통을 이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내용(金來龍, 1871 辛未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증광시 병과(丙科)
김익창(金益昌, 1614 甲寅生) : 문과(文科) 효종3년(1652) 증광시 갑과(甲科) 김병건(金秉鍵, 1824 甲申生) : 문과(文科) 철종14년(1863) 정시 병과(丙科) 김준(金浚, 1563 癸亥生) : 무과(武科) 선조16년(1583) 별시 을과(乙科) 김막룡(金莫龍, 1610 庚戌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정신(金貞信, 1603 癸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일손(金馹孫, 1603 癸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태허(金太虛, 1555 乙卯生) : 무과(武科) 선조13년(1580) 별시 병과(丙科) 김성립(金成立, 1596 丙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여흥(金麗興, 1627 丁卯生) : 무과(武科) 효종3년(1652) 증광시 병과(丙科) 등 모두 75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3명, 무과 45명, 생원진사시 27명) 세거지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대사리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평안남도 순천군 내남면 일원 평안남도 강서군 보림면 누항리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갈산리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회당리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연산동 평안북도 강계군 만포읍 문흥동 평안북도 무산군 동면 차유동 항렬자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기도 광주
광주(廣州)는 서울 남부일대와 경기도 중부를 통칭하는 옛 지명으로 13년(백제 온조왕 13)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불리어졌으며, 371년(근초고왕 25)까지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하여 376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다. 553년(성왕 31) 신라에게 땅을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756년(신라 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광주로 고치고, 983년(성종 2) 광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로 고쳐 관내도에 예속시켰다. 1012년(현종 3)에는 안무사(按撫使)로 고쳤으며 1018년 목사를 두었다. 1395년(태조 4) 광주목으로 경기좌도에 편입되었다. 1505년(연산군 15) 주를 폐하였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광주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광주군이 되었다. 1979년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한 이후 1989년 동부읍과 서부면이 하남시로 통합, 독립하는 등 규모는 축소되었다. 2001년 광주군이 광주시로 승격하였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광주김씨는
1985년에는 4,989가구 20,815명, 2000년에는 6,845가구 21,926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28,156명으로 조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