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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진최씨(耽津崔氏)
유래
시조 : 최사전(崔思全)
시조 최사전(崔思全)의 시호는 장경으로 해주최씨의 시조 최온의 증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이다. 최사전은 예종의 내의(內醫)로서 1126년(고려 인종 4년) 권신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부리자 인종과 협의하여 이자겸의 심복 탁준경(拓俊京)을 설득하여 이자겸을 제거케 하였는데 그공으로 병부상서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이 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고 탐진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탐진으로 하였으나 두 아들 최변(崔弁), 최효인(崔孝仁) 이하는 여러차례의 병화로 인하여 고증과 문헌이 실전되어 계통을 밝힐 수 없어 최사전을 시조로하고, 그 후손 중 최응규(應奎), 최준랑(俊良), 최효노(孝老), 최총(聰), 최윤덕(允德), 최홍건(弘建), 최유각(有恪), 최맹상, 최해(海), 최제노(悌老), 최심충(深忠), 최계(啓), 최승태(昇泰), 최장보(章甫) 등 세거지(世居地)의 이름을 딴 각파의 중시조를 1세조로 하여 대를 이어오고있다. - 묘소는 전남 강진군 군동면 나천리에 있고 향사일은 10월 15일이다. - 최사전은 1147년(의종 1년) 제겹공신으로 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인물
- 탐진최씨는 고려시대에 상락원직장(尙樂院直長)을 지낸 최철(崔哲)을 비롯하여 이부상서를 지낸 최승(崔弁), 중서령을 지낸 최응규(崔應奎), 예부상서를 지낸 최상(崔尙), 중랑장을 지낸 최원길(崔原吉), 병부상서의 최용승(崔龍陞),참지정사의 최표(崔彪)등 여러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번영하였다.
- 최상(崔尙) : 예부상서를 지내고 1056년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감찰어사가 되어 7도를 순시하고 1057년 내사사인지동관시독사(內史舍人知東官侍讀事)를 거쳐 1061년 좌유덕(左諭德)이 되었다. 1065년 병부상서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거란에 다녀오고, 1068년 동지중추원사로 지공거가 되었다. - 최중일(崔中一) : 1444년 진사가 되고 1450년 문과에 급제한후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1453년 지평(持平)을 거쳐 사간에 이르렀다. - 최경 : 조선 때의 인물로 세종 때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을 거쳐 별제(別提)에 이르렀다. 안견의 산수도와 함께 인물화를 잘 그려 유명하였는데 1472년 소헌왕후, 세조, 예종, 덕종의 어진(御眞)을 그린 공으로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으며, 뒤에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 최홍전 :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천문, 지리, 역상에도 밝았다. 167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각 조의 랑관(郞官)을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했다. 1694년 갑무옥사사(甲茂獄巳事)로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에 기용되고 뒤에 음죽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주요 인물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최병룡(崔炳龍, 1808 戊辰生) : 문과(文科) 고종16년(1879) 식년시 병과(丙科)
최홍전(崔弘甸, 1636 丙子生) : 문과(文科) 숙종5년(1679) 식년시 병과(丙科) 최신(崔信, 1789 己酉生) : 문과(文科) 헌종1년(1835) 증광시 병과(丙科) 최재철(崔在澈, 1844 甲辰生) : 문과(文科) 고종12년(1875) 별시 병과(丙科) 최사물(崔四勿) : 문과(文科) 선조9년(1576) 별시 병과(丙科) 최호중(崔好重)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최선립(崔善立, 1601 辛丑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최빈(崔濱, 1635 乙亥生) : 무과(武科) 현종13년(1672) 별시 병과(丙科) 최충신(崔忠信, 1599 己亥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최여곤(崔汝崑, 1649 己丑生) : 무과(武科) 숙종4년(1678) 증광시 병과(丙科) 등 모두 3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문과 5명, 무과 15명, 생원진사시 17명) 세거지
-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도림리 -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송덕리 - 전라남도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 -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호리 -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술산리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노천리 -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농소리 항렬자
강진 금천파
청양 예산 판서공파
준양파
효노파
광주 주서파
총파
윤덕파
광주 주남 급서남파
광주 주북파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강진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탐진으로 고쳐서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으며, 고려시대에는 영암(靈巖)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장흥(長興)으로 이속시켰다. 1417년(태종 17)에 병마도절제사영을 도강현(道康縣) 소재지에 옮기고 두 현을 합하여 강진으로 개칭하였고 치소는 탐진으로 하였다. 1429년(세종 11)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는데 1475년(성종 6)에 탐진으로 돌아갔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탐진군으로 승격되어 나주부(羅州府)의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백도면(白道面) 일부를 해남군에 이속하였고, 가우도(加牛島)를 합쳤고, 1936년 강진면이 강진읍으로 승격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탐진최씨는
1985년에는 14,609가구 61,841명, 2000년에는 21,191가구 68,127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89,943명으로 조사되었다. 참고사항
- 화성파(華城派)의 중조는 최응규(崔應奎)
-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의 중조는 최준량(崔浚良) -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의 중조는 최표(崔彪) -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의 중조는 최윤덕(崔允德) - 금남파(錦南派)의 중조는 최정원(崔井元) -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의 중조는 최해(崔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