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 김두남(金斗南)
시조 김두남(金斗南)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인 김방경(구안동김씨의 1세조)의 후손으로 고려에서 구례태수(求禮太守)를 지냈다고 한다.
김두남이 구례태수를 지냈으므로, 구례를 본관으로 했으며, 좌수사(左水使)를 지낸 김행(金荇)을 시조를 삼은 문헌도 있다.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
구례(求禮)는 전라남도 북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구지차현(仇知次縣) 또는 구차례현(求次禮縣)이었으나,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구례현(求禮縣)으로 고치고 곡성군에 속하게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남원부(南原府)의 관할이었고, 1143년(인종 21)에 독립하여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1413년(태종 13) 구례현으로 승격하였고 현감이 파견되었다. 세조 무렵에는 순천부(順天府)에 속하였으나 1499년(연산군 5)에 이 지방 사람이 역모에 가담한 죄로 폐현(廢縣)되어 부곡(部曲)으로 강등되어 남원부에 속하게 하였다. 1507년(중종 2)에 다시 현으로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구례군으로 남원부에 관할로 개편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고달면을 곡성으로 이속시켰고, 현내면·가사면을 구례면으로, 간전면·문척면을 간문면으로, 방광면·소의면을 광의면으로, 용강면·중방면을 용방면으로 통합하고, 토지면·마산면·외산면·내산면은 그대로 소속시켰다. 1932년에 내산면·외산면을 산동면으로 합하였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례면(求禮面)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봉성(鳳城)은 구례의 별칭이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구례김씨는
1985년에는 19가구 86명, 2000년에는 256가구 812명,
가장 최근인 2015년에는 91명으로 조사되었다.